취업 준비생 김성철(26·가명)씨는 구직을 위해 인터넷을 뒤지다 어느 날 눈이 번쩍 뜨였다. 한 사이트가 개설해 주는 본인 명의 계좌에 33만원을 입금하면, 조만간 672만원을 벌게 해준다는 글을 발견한 것이다. 처음엔 의심했지만 계(契)와 원리가 비슷하고, 본인 명의 계좌까지 만들어준다는 말에 솔깃했다. 김씨 명의의 은행 계좌에 돈을 넣는 것이니 설사 돈을 못 벌더라도 자기 돈은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김씨는 사이트로부터 'ㅇㅇ은행 김성철 XXX-XXXX-XXXX' 계좌를 부여받아 33만원을 입금했다. 하지만 해당 사이트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김씨는 33만원을 돌려받기 위해 은행을 찾았다. 그러나 해당 은행엔 김씨 명의로 된 어떤 통장도, 계좌도 존재하지 않았다. 김씨는 "내 계좌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사기 사이트 소유였고, 사기꾼들이 내 돈을 들고 달아나 버렸다"며 "어디 가서 하소연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낙담했다.

시중은행들이 가상계좌를 무분별하게 발급한 뒤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피싱(phishing·금융사기)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각 은행들에 내부 통제를 강화할 것을 지시하며 관리감독에 나섰다. 은행 관리부실로 소비자 피해가 추가로 발생하면 담당자 문책 등을 통해 엄중 징계하겠다고 통보했다.

가상계좌 81억9000만개 달해

가상계좌란 실제 계좌에 딸려 있는 연결계좌를 뜻한다. 학원비, 아파트 관리비, 우유 배달비, 각종 지방세 납부 등에 활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A학원이 수강생들로부터 학원비를 입금받기 위해 A학원 명의의 계좌를 B은행에 개설한다. 이는 실제 존재하는 계좌로 모(母)계좌라고 한다. 이후 A학원은 B은행에 요청해 수강생 숫자만큼 모계좌에 딸린 연결계좌를 만들 수 있다. 수강생이 100명이라면 100개, 1000명이라면 1000개를 만들 수 있다. 이때 연결계좌의 번호는 모두 다르고, 각 수강생의 이름으로 부여된다. 홍길동이란 수강생은 학원으로부터 'B은행 홍길동 XXX-XXXX-XXXX'란 계좌를 받는 것이다. 이후 수강생이 이 번호로 입금하면 돈은 학원 소유의 모계좌로 들어간다. 수강생이 부여받은 계좌는 학원이 수강생 개인 식별을 하기 위한 일종의 코드에 불과하고, 실제론 모계좌로 입금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은 통장도 없고 단지 번호만 부여받는데 이를 '가상계좌'라고 부른다.

5월 말 현재 가상계좌의 수는 81억9000만개에 달한다. 국민 1인당 164개를 갖고 있는 꼴이다. 활용하고 있는 업체는 전국 16만4000개에 이른다. 가상계좌 수는 2011년 57억3000만개, 2012년 66억1000만개, 2013년 77억4000만개 등으로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이는 송금받는 업체의 편의성 때문이다. 수많은 고객으로부터 송금받는 기업 입장에서 누가 언제 돈을 넣고 미납 금액이 없는지 등을 실시간으로 관리하는 게 무척 번거롭다. 이때 개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가상계좌를 만들면 쉽게 입금자와 입금 내역을 파악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은행들은 수수료 수입을 올린다. 계좌 1개당 발급 시 100원, 입금 시 300원이 업계 평균 수수료이다. A학원이 B은행에 1000개의 가상계좌를 개설해 매월 1000건의 입금을 처리하면, B은행은 A학원으로부터 발급 시 10만원(1000개×100원)을 받은 뒤, 매달 30만원(1000개×300원)을 받는다. 시중은행들은 지난해 가상계좌를 통해 총 583억원의 수수료 수입을 올렸다.

국민 등 4개 은행, 관리 지침 전혀 없어

이런 가상계좌가 신종 피싱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금감원은 지난해 가상계좌 등을 활용한 불법 사기 사건 108건을 적발했다. 올해에도 상반기에만 66건을 적발했다.

피해자들이 쉽게 속는 것은 본인 이름으로 된 계좌번호를 보고 본인의 실제 계좌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피해가 증가하자 금감원은 최근 17개 시중은행을 일제 점검했다. 그 결과 KB국민, 기업, SC, 부산 등 4개 은행이 가상계좌와 관련한 어떠한 내부 지침도 없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나머지 은행들은 지침이 있더라도 업무 절차 등을 설명하는 정도에 그쳤다. 금감원 관계자는 "가상계좌를 개설하는 업체가 어떤 곳인지, 왜 개설하는지, 이용 목적은 무엇인지 등을 확인해서 사기 업체를 걸러내야 하는데 그런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 불법 사용하는 곳은 없는지 등에 대해 사후 모니터링을 해야 하는데 그런 은행도 없었다. 사기 목적으로 가상계좌 개설을 의뢰해도 이를 걸러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금감원은 최근 지도 공문을 통해 가상계좌 개설 목적 등을 확인한 뒤 심사 후 가상계좌를 발급하도록 하고, 발급 후에도 사용 목적에 맞게 사용되는지 점검하도록 지시했다. 또 고객들에게도 가상계좌가 본인 계좌가 아니라는 점을 알리도록 조치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은행 관리 소홀로 사기 사건이 발생하면 그 책임을 엄중하게 물을 계획"이라며 "소비자들도 피해를 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상계좌

학원 등 여러 고객에게서 대금을 받는 업체가, 송금하는 각 고객에게 부여하는 은행 계좌. 계좌 번호는 고객 이름으로 돼 있지만 통장이 따로 없으며, 고객이 가상 계좌로 보낸 돈은 업체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