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근 지식문화부장

휴가철이다. 이맘 때면 생각나는 곳이 있다. 강원도 고성군의 화진포다. 동해 바다와 석호(潟湖)를 양쪽에 끼고 있는 이 곳은 말 그대로 천혜의 휴양지다. 6·25 이전에는 김일성 별장이 있었고, 종전 후 남한으로 편입된 뒤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도 별장을 뒀던 곳이다. 그곳에 군 휴양 콘도가 있었다. 군 시절 단기 장교로 복무한 덕분에 그곳에서 여름 휴가를 즐기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근무지였던 공군사관학교 인근에는 대통령 휴양 시설인 청남대도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대청댐 경관에 반해 대통령 전용 별장으로 지은 곳이다. 안까지 들어갈 순 없었지만 주변만 둘러봐도 규모가 대단했다. 노무현 정부 때 관광지로 개방됐지만 아직 가보지는 못했다.

대통령의 별장들은 이렇듯 민주화와 더불어 하나둘 시민의 손으로 넘어왔다. 그와 더불어 대통령의 휴가도 점점 쪼그라들고 있다.

올 여름 박근혜 대통령의 여름 휴가만 해도 그렇다. 평소 대통령 동정에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닌데 관련 기사에 눈길이 갔다. 4박 5일 휴가 동안 관저에 머무르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른바 ‘방콕’ 휴가다. 관저는 집무실이 있는 청와대 본관에서 차로 3~4분 거리에 있다고 한다.

그게 휴가 맞나 싶은 생각부터 들었다. 하기야 적잖은 시민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방콕’ 휴가에 그치는 마당에, 대통령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더구나 대통령은 휴가조차 국가가 처한 상황과 여론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올 여름 휴가 계획이 구설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린다. 메사추세츠주 휴양지인 마사스 빈야드에서 9일 휴가를 쓴다는 발표를 한 후, 여기저기서 비판이 일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교전 같은 국제 현안이 널렸는데 그럴 수 있느냐는 얘기다.

대통령의 휴가는 일정 자체가 그 때의 국정 상황을 보여주기도 한다. 작년 여름 승승장구했던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느긋하게 3주를 쉰 반면, 지지율이 바닥권이었던 프랑스의 올랑드 대통령은 1주일에 그쳤다.

박 대통령의 이번 휴가 계획도 정국과 여론을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세월호 참사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어디로 움직여도 비난을 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선거도 코앞에 있지 않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대통령의 ‘방콕’ 휴가에 대해서도 야당은 준비된 화살을 날렸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유가족과 야당 국회의원들이 노숙과 단식을 하다가 병원으로 실려가고 있어도 대통령은 오늘부터 휴가라고 말한다”면서 “새누리당과 청와대는 심각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고 논평을 냈다.

하지만 나는 반대다. 국정을 생각해서라도 대통령은 관저 밖으로 휴가를 갔어야 한다. 평소에도 청와대에서 두문불출, ‘일벌레’로 소문난 대통령 아닌가. 그런 독거 스타일 때문에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지 오래다. 평소 밥도 혼자 먹는 때가 많다는 이야기는 확인한 바 없으니 논외로 하자.

다만 최고 국정권자라면 휴가를 이용해서라도 관저 밖의 공기를 호흡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불어로 연설까지 하는 대통령이니 바캉스의 원뜻이 뭔지도 알 것이다. 그런 휴가를 맞아 대통령은 거처를 ‘비운’ 게 아니라 문을 닫고 들어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통령의 ‘어정쩡한 여름휴가’ 첫 날, 대통령은 관저에서 서류 등을 읽었고, 휴가 중인 수석들조차 대부분 일손을 놓지 못했다고 한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들이 하루 중에서 행복감이 가장 떨어지는 순간이 보스와 있을 때라고 답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 중에, 심지어 2차 대전 동안에도 휴식과 재충전을 위해 워싱턴DC를 떠나 있곤 했다. 링컨도 내전 와중에 백악관을 떠나 근교 노병사의 통나무집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원기를 회복했다고 기록에 나온다. 그 오두막은 지금은 유적지가 돼 있다.

대통령의 휴가 여행은 내수를 진작하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외국 정상들이 어디에서 쉬고 왔다는 기사가 뜨고 나면 그 지역 관광 경기가 좋아졌다는 얘기가 뒤따른다. 어느 지도자가 휴가 때 들고 간 책이 화제에 오르기도 한다.

이미 박 대통령의 휴가는 시작됐다. 이틀이 지났다. 남은 바람은 하나다. 대통령이 관저에 칩거하는 동안에라도 어떤 보고서가 아니라 무슨무슨 책으로 삼매경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