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제공

싱가포르에는 높은 산(山)이 없다. 가장 높은 산인 ‘부킷티마 힐’은 해발 164m에 불과하고 두번째로 높은 산도 해발 85m, 세번째로 높은 산도 40m에 그친다. 그런 싱가포르에 현대건설이 높이 60m의 산을 우연히 만들어냈다.

싱가포르 서쪽 끝 주롱섬 해저에 유류 비축기지를 짓는 과정에서 땅을 팔 때 발생한 발파석을 공사장 뒷편에 임시로 쌓았는데 그것이 높이 60m의 돌산을 이룬 것이다. 싱가포르 주롱섬에서 근무하는 현대건설 현장 관계자 200여명은 새해 첫날 돌산에 올라 함께 일출을 보고 신년 목표를 되새겼다.

◆ 바다 밑 뚫고 11km 터널과 오일 탱크 지어

현대건설(000720)이규재 현장소장은 28일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현대건설이 주롱섬에 단독으로 짓고 있는 유류기지는 싱가포르 최초의 지하 유류저장기지”라고 설명했다.

주롱섬은 싱가포르 정부가 전략적으로 ‘오일 허브’로 키워낸 곳으로 한국,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와 같은 대량 석유 소비국 기업들이 입주해 오일을 거래하는 곳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유류·화학제품을 비축할 땅이 부족해지자, 주롱섬 해저를 뚫고 대형 유류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현대건설 이규재 현장소장

총 1800만 배럴 규모의 주롱섬 해저 유류기지 공사는 1차·2차로 나눠진다. 이 중 현대건설은 930만배럴 규모의 유류 저장탱크(총 5기)를 시공하는 1차 공사를 맡았다. 총 사업비만 7억1400만달러(약 7700억원)가 투입되고 최첨단 공법이 이용됐다. 1차 공사는 올 하반기에 준공된다. 2차 공사(870만배럴)는 1차 공사가 준공된 이후에 발주가 시작될 예정이다.

주롱섬에서 최대 45톤(t)을 실을 수 있는 승강기를 타고 지하 100m로 내려가면 높이 10m, 너비 20m, 총 길이 11km의 거대한 지하 터널이 나온다. 이 터널로 들어가면 좌우로 길이 나뉘고 300m를 걸어 들어가면 새로운 동굴과 터널이 등장한다. 이 소장은 “지하 터널이 마치 개미굴처럼 복잡하다”고 말했다. 하루에 많으면 14개의 터널을 동시에 발파해 굴착한 적도 있다. 이 터널을 통해 대형 불도저, 덤프트럭, 대형 드릴 등 다양한 장비들이 오고 간다.

이 소장은 “공기가 촉박한 상황에서도 현장의 안전과 품질을 최우선하며 기본을 지키며 공사를 진행했다”며 “터널 보강 작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해 지금까지 단 한 건의 사고 없이 진행했다”고 말했다.

현대건설이 지난 2010년 착공할 때에는 해저 암반을 뚫는 것보다 곳곳에서 쏟아지는 바닷물을 막는 것이 더 어려웠다. 바닷물이 예상보다 10배 더 많이 터널 안으로 밀려 들어와 물줄기를 막는 ‘그라우팅’ 작업만 5개월이 걸렸다. 터널 안쪽으로 물이 새어 들어오지 않게 암벽에 시멘트를 주입하는 작업이다.

현대건설 제공

터널이 복잡하다보니 현지 공급사의 자재를 실은 트럭의 운전기사들이 터널에만 들어오면 길을 헤맸다. 이규재 소장은 “안내 지도도 제공했지만 동굴같이 생긴 터널에서 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며 “어쩔 수 없이 길잡이 인원을 추가로 배치시켜, 자재 공급사의 트럭이 진입할 때마다 동승시켜 목적지까지 안내했다”고 말했다.

해저 유류기지에선 오일이 탱크밖으로 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오일이 시설물 안에 퍼지면 직원들이 석유 가스에 질식할 수도 있고 대형 폭발로 이어질 수도 있어서다. 현대건설은 저장탱크 주변으로 작은 터널을 뚫고 여기에 물을 채워, 저장탱크 주변의 암반 사이에 물이 모세혈관처럼 퍼져 석유 증기를 가두는 공법을 이용했다.

◆ 바닷속 공사장, 찜질방보다 더워 중동이나 다름없어

“지하 공사장은 시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해저 100m~130m까지 뚫고 가보니 지하 터널 평균 온도가 35도를 웃돌고 습도는 90%에 달했다. 터널에 들어가면 5분만에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마치 사우나에 들어온 것 같다.”

이규재 소장은 “중동서 근무하던 한 직원이 ‘낭만의 도시’ 싱가포르를 생각하고 주롱섬에 근무하러 왔다가 ‘차라리 중동이 낫겠다’며 2년만에 중동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현대건설 제공

주롱섬은 싱가포르 정부에서 지정한 정유화학단지라서 출입관리소를 지나며 지문조회 등 검문을 받아야만 통과가 가능하다. 이 소장은 “주롱섬이 싱가포르 서쪽 끝자락에 동떨어져있기 때문에 싱가포르 도시를 관광할 여유도 없어, 직원들 입장에서는 마치 수용소에서 일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며 “정유화학단지 내에 있는 숙소에 상주하는 근로자의 경우 주말에만 섬 밖으로 외출이 겨우 허가됐다”고 말했다.

현대건설은 현장 근로자들의 어려움을 달래주기 위해 4개월에 한번씩 긴 휴가를 주고 있다.

싱가포르 현장 근로자들과 문화적 차이를 좁히는데도 애를 먹었다. 현장 특성상 24시간 주야 2교대로 주어진 일정에 따라

현대건설 이규재 현장소장

작업이 진행됐다. 그런데 이슬람교 금식 기간인 라마단 기간에는 야간 작업이 시작한 후에도 무슬림 근로자들의 기도시간 때문에 같은 팀의 다른 근로자들은 밖에서 대기를 해야하는 등 협업에 차질이 생겼다. 이규재 소장은 "결국 라마단 기간에는 주야간 근무조를 융통성있게 편성해 근로자들간의 불만과 업무 공백을 최소화했다"고 말했다.

◆ 발주처 만족도 높아 추가 공사 맡겨…해외 방문객 줄지어

지하 복합 구조물 공사는 토목·플랜트 부문에서 미개척 분야로 여겨진다. 일반 유류기지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해외에 해저 유류기지를 짓는 것은 현대건설도 처음으로 도전하는 분야였다. 태아건설(터널 굴착 담당), 우림플랜트(지하 기계·배관 공사) 등 국내 중소 협력업체도 싱가포르 최초 유류 비축기지 공사에 참여하며 기술력을 뽐냈다.

이 소장은 “지난 30여년간 현대건설이 싱가포르 시장을 개척하면서 얻은 노하우 덕분에 주롱섬 해저 유류기지라는 대규모 국책사업을 수주할 수 있었다” 고 말했다.

현대건설 제공

발주처는 주롱섬 안에서 진행되던 소규모 공사들을 현대건설에 대신 수행해달라고 맡기기도 했다. 현지 시공사들이 공사를 진행하다가 지하수 유출 등의 문제로 공사가 어려워지자 공사를 멈추고 진도를 빼지 못하던 작업들이었다.

이규재 소장은 “유수 대학, 정부기관, 연구소, 터널협회, 타 건설회사, 엔지니어링 회사 등 지하비축기지 공사에 관심이 있는 기관들도 주롱섬 현장을 방문해 현대건설의 노하우를 견학하고 배워가고 있다”며 “한국의 유류비축기지 건설 기술을 세계에 알려 지속적인 수주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