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유보금이 죄악일까.
가계 소득 악화의 범인으로 기업들의 사내 유보금이 지목되고 있다. "기업들이 돈을 벌어서 투자를 하지 않은 채 현금을 묵혀두고 있고, 이 때문에 가계로 돈이 돌지 않는데, 놀고 있는 돈을 외부로 빼 내야 경기가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IMF 사태 이후 부(富)가 가계에서 기업으로 이전됐고, 자금은 기업에 유보금의 형태로 잠겨 있으며 한국 기업의 유보금은 전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는 분석이 붙는다.
사내 유보금을 풀면 정말 경기는 살아날 수 있을까? 언제나 쪼들린다고 아우성인 기업들은 언제 사내 유보금을 쌓은 것일까? 정말 사내유보금은 많은 것일까? 사내 유보금의 진실을 알아봤다.[편집자주]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우리 경제의 선순환을 위해서 (기업이) 사내 유보금을 지나치게 많이 보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적정 수준만 보유하고 나머지는 투자, 배당으로 기업 외로 공급해줘야 가계가 잘 돌아갈 것입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8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대기업이 사내 유보금을 지나치게 많이 쌓아 놓고 있어 국민이 가난하다는 지적에 대해 이 같이 말했다. 그는 사내 유보금과 관련해 인센티브를 주거나 과세하는 방법으로 유보금을 줄이고, 외부로 자금을 내보내 경기를 선순환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우리나라의 사내유보금은 정말로 많은 것일까?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기업의 유보율이 높아진 것은 대체적으로 맞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큰 오해와 착시가 있다고 지적한다.

기업 유보율의 세가지 착시
착시1: 유보율이란 '이름'의 착시

착각: 유보율은 기업이 투자하지 않고 쌓아둔 돈의 비율이다.
현실: 유보금은 현금이 아니다. 투자를 해도 유보금이 올라간다.

‘사내 유보금이 많다’ 또는 ‘유보율(유보금을 자본금으로 나눈 비율)이 높다’고 해서 기업들이 투자를 적게 한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유보(留保)’란 나중으로 미루어 둔다는 뜻이다. 때문에 ‘사내 유보금’이란 말을 들으면 번 돈을 투자하거나 주주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기업이 은행에 쌓아두고 있다는 뜻처럼 알기 쉽다.

하지만 회계상 유보금이란 기업이 영업을 해서 남은 돈 가운데 직원이나 주주에게 주지 않은 나머지 금액을 말한다. 이 유보금은 기업이 은행에 쌓아 둘 수도 있고, 설비 투자에 묻을 수도 있으며,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회사의 지분을 사는 데 쓸 수도 있다.

착시2: 10대 그룹, 30대 그룹의 착시

착각: 최근 우리나라 기업들은 돈을 벌고 투자는 안 해 사내 유보율이 급등했다.
현실: 우리나라 기업의 유보율은 90% 중반에서 유지되고 있다.

자료: 에프앤가이드, 한국은행 30대 그룹까지는 2013년, 대기업과 국내 모든 기업은 2012년 기준.

1500%와 95% 중 어느 것이 맞을까.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10대 그룹의 92개 상장사의 유보율은 지난해 말 현재 평균 1534%다. 유보율은 지난 3년간 매년 130%포인트씩 증가했다. 유보금은 매년 53조원씩 늘었다. 확실히 돈은 많이 벌었다.

그러나 30대 그룹으로 시야를 넓히면 유보율은 이 보다 낮아지지만, 아직 그래도 높은 편이다. 작년 말 30대 그룹 192개 계열사의 유보율은 1168%다. 연 평균 65%포인트씩 늘었다.

하지만 이런 1000%, 1500%씩 하는 사내 유보율은 거대 기업에 한정된 수치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국내 전체 기업의 사내 유보율을 평균하면 95%에 불과하다. 지난 2009년 이후 4년간 1%포인트 증가하는 데 그쳤다. ‘대기업’으로 한정하면 유보율은 93%로 떨어진다.

착시3: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라는 착시

착각: 우리나라 기업들은 많은 이익을 거뒀고, 기업 내부에 쌓여 있다.
현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를 빼면 그렇게 많은 돈을 벌지 못했다.

삼성전자의 유보금은 지난해 말 현재 151조원이다. 현대차는 52조원이다. 두 회사는 지난 1년간 유보금으로 27조원, 8조원을 새로 쌓았다. 우리나라 1년 예산의 10%에 달하는 규모다.

자료: 에프앤가이드

다른 기업도 이럴까. 대답은 ‘아니오’다.

30대 그룹 192개 상장사 중 삼성전자와 현대차를 뺀 나머지 190개 기업의 유보금은 468조원이다. 삼성전자와 현대차를 합친 금액의 2배 정도 수준이다. 게다가 지난 1년간 유보금으로 신규 적립한 금액은 19조원이다. 190개 기업이 쌓은 유보금이 2개 기업의 고작 3분의 1 수준이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라는 두 개의 글로벌기업이 유보금 증가에 착시현상을 만든 것이다.

잘못된 진단과 미흡한 대책

30대 그룹의 사내 유보금은 늘었다. 그리고 양극화도 심해졌다. 극소수의 슈퍼 기업의 유보금이 ‘증가했다’는 점에만 초점을 맞추면 현실을 보지 못한다.

자료: 에프앤가이드

30대 기업이 모두 유보금을 쌓을 정도로 이익을 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30대 그룹 중 삼성, 현대차 그룹과 현금 창출 능력이 뛰어난 롯데, 신세계, 현대백화점 그룹을 제외한 25개 그룹의 사내 유보율은 지난 3년간 오히려 감소했다. 유보율이 30%에 그친 대우건설(047040)이나, 79%인 현대그룹, 75%인 금호아시아나그룹도 있다.

소수의 기업은 돈이 남아 돌고, 대부분의 기업은 돈이 모자라 걱정이고, 적자를 보는 기업도 많다는 뜻이다.

이는 사내 유보금에 과세하는 정책이 시행되더라도 실효성을 가질 수 있을 지 의문을 품게 한다. 전문가들은 '잘 나가는' 기업을 제외한 나머지 기업의 자금 사정이 좋아지지 않고, 어떤 기업은 유보율이 감소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아 사내 유보금에 과세하는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규제 대상이 될 확률도 크지 않다고 지적한다.
기업의 유보율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돈이 가계로 돌지 않는 것이 문제라면 유보금을 규제하거나 인센티브를 주어도 그 효과가 극히 미미할 것이라는 얘기다.
김윤경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사내 유보율을 기준으로 과세를 하게 된다면, 일부 기업만 과세 대상이 돼 효과가 미미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기업이 프론티어 정신을 잊고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어 장기적으로 우리 경제의 체질을 약화시키는 치명적인 악수가 될 수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얘기한다.

전문가들은 유보율 수치라는 ‘평균의 함정’에 빠져 근시안적인 정책을 펴는 것은 곤란하다고 지적한다. 과거 성장기처럼 모든 기업이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일괄적인 정책보다는 핀포인트로 과도한 부분을 다른 쪽으로 이끌어주는 섬세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기업에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세금이나 법률로 기업들을 규제하려 것 보다는, 전통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유보금이 많은 몇몇 기업들을 대상으로 벤처·중소기업으로 자금을 투자하도록 펀드를 조성하거나 사회적으로 필요한 사업에 투자를 이끌어내는 것이 더 현실성이 있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물론 이 경우 더욱 큰 리더십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