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자업체 도시바가 자사에서 근무했던 직원이 경쟁사인 SK하이닉스(000660)로 이직, 반도체 기술이 유출됐다면서 1조원 이상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두 회사는 차세대 메모리반도체를 공동 개발하는 등 국적을 뛰어넘는 연대를 형성해왔지만, 이번 소송으로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반도체기업간의 법적분쟁이 불가피하게 됐다.

반도체업계에서는 도시바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첨단산업의 대표 분야인 반도체에서 직원 한명이 기술을 통째로 제공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SK하이닉스는 과거에도 미국 램버스와 반독점·특허소송을 놓고 10년 넘게 다툰 적이 있다. 하지만 끈질긴 방어 끝에 ‘승리’를 이끌어낸 전례가 있는 만큼 도시바와의 분쟁 역시 자사의 결백을 밝히고 한국의 대표하는 메모리 반도체 기업으로서의 자존심을 살리겠다는 전략이다.

◆ 도시바 1조원 손해배상소송 배경은?

SK하이닉스는 21일 도시바가 자사를 상대로 일본 도쿄지방법원에 1조1000억원대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고 공시했다. 도시바는 소장에서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기술정보 파기하고 이를 이용해 제조한 낸드플래시 생산과 판매를 금지하여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일본 도시바가 SK하이닉스에 유출됐다고 주장하는 기술은 ‘낸드플래시 메모리’ 자료다. 도시바에서 근무했던 직원인 스기타 요시타카(杉田吉隆·52)씨가 2008년 SK하이닉스로 옮기면서 이를 제공했다는 제보를 받았다. 도시바는 스기타씨가 하이닉스 직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컴퓨터 공유 파일에 도시바 연구 데이터를 올려놓았다고 주장했다. 낸드플래시는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 모바일 기기에 주로 쓰이는 메모리 반도체다.

조선일보DB

도시바와 돈독한 사업파트너인 미국의 샌디스크도 SK하이닉스를 상대로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스기타씨가 2008년 당시 샌디스크 일본 법인의 기술 연구직으로 일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소장을 면밀히 검토하고 회사의 입장을 적극 밝히겠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이 사건이 처음 보도된 올 4월 도시바의 주장이 과장됐다고 언급했다.

업계는 소송이 아직 초기 단계이고 기술 침해 여부를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고 본다. 홍성호 LIG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수년이 지난 상황에서 기술침해 여부를 판단하기가 어렵고 청구금액이 축소될 가능성과 소송의 장기화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JP모건은 “직원 한 명 문제로 1조원 소송은 비상식적이고, 한 직원이 단기간에 기술에 큰 영향을 줬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 “日의 의도적인 발목잡기”…SK하이닉스 이번에도 승리할까

반도체업계는 도시바의 이중적 플레이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도시바는 소송을 제기한 후에도 “소송과 별개로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 개발을 위한 SK하이닉스와의 제휴 관계는 유지하겠다”고 했다. 두 회사는 2007년 플래시메모리 기술 특허공유 협약도 맺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소송을 제기한건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이끌고 있는 한국 기업을 자극하고 견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는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아이서플라이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삼성전자는 37.4%로 점유율 1위, SK하이닉스는 10.7%로 4위에 올랐다. 도시바는 31%로 2위를 차지했다. 도시바는 한국 업체와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D램 사업을 접었고, 현재는 낸드플래시에만 집중하고 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일본의 한국 견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며 “일본 언론과 힘을 합쳐 한국 기업이 일본의 기술을 불법으로 취득하고 있다는 보도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SK하이닉스는 과거의 경험을 거울삼아 신중하면서도 치밀한 대응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결백을 밝히겠다는 입장이다. 만일 도시바의 주장이 허위로 드러날 경우, 죄없는 사람에게 행패를 부린격이라는 비난이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도시바는 2006년 SK하이닉스를 상대로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했다가 미국 무역위원회로부터 패소 판정을 받았다. SK하이닉스는 미국 반도체회사 램버스와도 10년 넘게 진행된 반독점·특허소송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저력이 있는 회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