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종이책은 종이책이고, 전자책은 전자책이잖습니까. 전자책 같은 종이책이 없어요. 종이책에 손대면 소리 나오게끔 하면 안됩니까? 종이책을 딱 펼치면 영상이 떠오르고 헤밍웨이 책 읽다가 헤밍웨이의 탄생연도를 궁금할 때 바로 나오게 하는 기술 말이죠. 이전에는 통신 속도가 느려서 하지 못했지만, 이제 이 정도 기술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손만 대면 그 책 안에 든 모든 정보를 공유할 수 있어요."

2014년 5월 21일 오전 10시 이어령 전(前) 문화부 장관(80)을 서울 서소문동 배재빌딩 한·중·일 연구소에서 만났다. 그는 내년 5월까지 그동안 쓴 저서를 모아 총 60권의 전집을 낼 계획이라며 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21일 서울 서소문 한중일연구소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은 웬만한 얼리어답터들보다 먼저 각종 정보통신(IT) 기기들을 이용한다. 그의 서재에는 컴퓨터 7대와 스캐너 2대 등 각종 디지털 장비가 완벽하게 갖춰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기기들을 이용해 직접 자료를 모으고, 검색하고, 정리한다.

그는 노태우 대통령 시절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고, 1988년 서울 올림픽·2002 한일월드컵·새천년준비위원회에서 기획자를 맡아 각종 국가적인 문화행사를 선두에서 지휘했다. 특히, 문명과 정보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디지로그’ 등 시대를 풍미한 표어(slogan)를 지었다.

이 전 장관은 30여 년 전 누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도 생생하게 끄집어 냈는데, 두 손으로 들어 장면을 묘사할 때마다 왼쪽 손목의 ‘갤럭시 기어’가 빛났다. 갤럭시 기어는 삼성전자가 내놓은 최신 스마트워치다.

- 문학평론가로 활동하시면서 정보기술(IT)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정보화에 관해서는 개인적 체험과 공공적 체험이 있지만, 개인적인 체험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란 책을 썼을 때가 산업화 시대였던 1981년입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자, 중소기업들이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워크스테이션을 하나둘씩 쓰기 시작하면서, IBM의 대형 컴퓨터 ‘메인프레임’ 독주에 조금씩 제동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고 하이텔의 전신인 ‘케텔(KETEL)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유’ ‘네트워크’라는 개념이 싹트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나도 컴퓨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2001년 8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자택 서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책장 옆에 디스켓 다발과 브라운관 모니터가 보인다.

- 1980년대 한국의 정보화 수준은 어떠했습니까?

외국 기자들이 1988년 한국에서 올림픽 한다고 하니까 웃었어요. 올림픽은 세계 기자들이 모여 실시간으로 기사를 보내야 하는데, 전화도 제대로 안 되는 한국에서 무슨 올림픽을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전화 스위치 박스(교환기) 하나 못 만들었어요.

우리 집에 전화를 설치했다고 좋아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발신은 되는 데 수신은 안 되는 거예요. 그때 얼마나 실망했던지요. 그런 정보화 빈곤을 겪고 나니까 알겠더라고요. 하나씩 산업화를 계단 밟듯이 쫓아 가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이죠.

엘리베이터로 예를 들어 볼게요. 2~3층 가던 엘리베이터를 고쳐서는 60층 가는 고속 엘리베이터를 만들 수 없어요. 그런 엘리베이터로는 60층 가는 데 온종일 걸릴 수 밖에 없을 겁니다.”

- 88 서울 올림픽에서 식전 행사 기획을 맡았습니다. 88 서울 올림픽은 정보화 시대가 오는 데 어떤 역할을 했나요?

“원래 서울올림픽의 성화 마지막 봉송 주자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 옹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기밀 보장이 안 되는 나라였습니다. 손기정 옹이 ‘파이널 주자’라는 것이 다 알려졌습니다.

제가 박세직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한테 “역대 올림픽 국가 중에 마지막 성화 봉송 주자 이름이 먼저 새나간 데가 있느냐. 없다. 이건 안 된다”고 말하고 최종 주자를 다시 뽑았어요. 그게 ‘라면 먹고 뛰었다’고 알려졌던 임춘애 육상 선수예요.

그런데 임춘애를 발탁했다는 것을 선수촌에 알리면 또 새어나가 버릴 것 아니에요. 그래서 임춘애도 모르게 하고 나와 조직위원장 포함, 딱 세 사람만 알고 있기로 했습니다. 기자들에게 뿌릴 보도자료도 제가 집에서 워드프로세서로 직접 작성했어요. 발표 당일 새벽에 이걸 인쇄하고 영문 번역하고 외신 기자한테 뿌렸습니다.

그때 알았죠. 정보화가 널리 퍼뜨리기도 하지만, 비밀로 지키는구나. PC에 암호를 걸어놓으면 특정 사람이 아니면 못 보는구나. 정보화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구나하고 말이죠.”

- 언론사 논설위원과 문화평론가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만큼 ‘문서작성기(워드프로세서)’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죠. 워드프로세서를 중심으로 ‘정보화’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컴퓨터 발전 과정을 보면 메인프레임에서 워크스테이션으로 갔다가 퍼스널컴퓨터(PC)로 발전했죠. 1980년대 일본 사람들은 ‘축소지향의 일본인’답게 컴퓨터의 계산기능만을 빼내 계산기 ‘카시오’를 만들고 문서작성 기능만 빼내 워드프로세서 전용기기를 만들었어요. 일본에선 개인용 컴퓨터가 아니라 일본 환경에서만 쓸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 전용기기가 싼값에 엄청 많이 보급됐어요.

당시 제 동료 중에는 컴퓨터로 글 쓰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면서 ‘아, 우리가 서양에 왜 뒤졌을까. 헤밍웨이는 반바지 입고 타자기로 아름다운 영어 문장을 써내려가고 마크 트웨인도 19세기에 타지기를 썼는데, 한국 사람은 붓으로 쓰다가 시간을 보내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거는 몰라도 정신적인 작업은 빨리 컴퓨터화하자. 타자기는 보급되지 않았지만, 한자·한글 혼용 등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 컴퓨터는 생활화하자. 이건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일본에서 한자를 2바이트(double-byte character) 컴퓨터 문자로 바꾸는 거를 보고 (컴퓨터를 생활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는 강단에서 대학생들에게 대우가 만든 문서 작성 전용기 ‘르모’를 쓰라고 하기도 하고, 대학동창인 이헌조(前 LG전자 회장)한테 르모를 여러 대 구해달라고도 했다고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에 워드프로세서 전용기가 한국에도 보급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 ‘아래아 한글’을 개발한 한글과컴퓨터 창업자인 이찬진씨와도 가까운 사이로 알고 있습니다.

“서울 올림픽이 막 끝났을 무렵입니다. ‘아래아 한글’을 처음 사용하고 그야말로 기가 막혔습니다. 한 번 써보자마자 바로 개발자가 누구인지를 수소문했습니다. 이찬진 씨한테 전화를 걸어 ”누가 회사 산다고 해도 절대로 팔지 마라”고 했습니다.

또 그 전화를 끊자마자 이상희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한테 전화를 걸어서 “세종대왕의 길을 걷고 싶습니까, 아니면 최만리(조선시대 한글 창제에 반대한 인물로 알려져 있음)의 길을 걷고 싶습니까. 아래아 한글 개발팀이 우리나라 정보화를 앞당길 능력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인연이 돼서 나중에 이찬진 씨와 김희애 씨가 결혼할 때 주례를 섰습니다.”

이찬진 현 드림위즈 대표는 인터뷰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전 장관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 이 대표는 이 전 장관과 릴레이 강연을 펼치거나, 이 전 장관이 명예교장으로 있는 경기 창조학교에서 특강을 하기도 했으며 이 장관의 팔순 잔치에도 참석했다.

- 1991년 초대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습니다.

“문화부에서도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직원들이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 내가 ‘로터스 1·2·3’ 등 각종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다루는 장관이었으니까요. ‘어젠다’라는 프로그램은 일정 관리 프로그램입니다. 프로젝트를 언제까지 하겠다 하면 정해놓은 날 알림을 보내주는 거에요.

장관들은 보통 국장이나 과장을 통해 업무를 지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제 경우는 이런 프로그램들을 이용해서 문화부 사무관에게 지시를 바로 했습니다. 만약 오늘이 마감인데 프로젝트를 끝내 놓지 않았으면, “왜 마치지 않았느냐’고 지적했습니다.

또 검은 가방에 노트북을 들고 다녔는데, 문화부에서는 그걸 보고 ‘공포의 블랙박스’라고 불렀습니다. 각종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었으니까요.”

-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어떻게 탄생했습니까?

“문화부 장관 하면서 ‘정부가 만약에 정보를 쥐고만 있다면 빅 브라더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꾸로 국민이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빅 브라더를 감시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빨리 어린 아이들부터 컴퓨터를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 당시 이런 부분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 삼보컴퓨터를 만든 이용태, 부총리 지내셨던 오명. 그리고 저 이렇게 세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도 관심이 있었어요.

당시 과학기술처에서는 정보화를 문화나 시대 사안으로 다루지 않고, 좁은 의미의 기술 분야로 다루려고 했어요. 그래서 ‘사용자 중심, 유저마인드로 캠페인을 하려면 미디어가 있어야 한다, 방송이나 신문 같은 미디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디어 캠페인이 시작된 배경입니다.

전문가 조찬 좌담회에서 서로 의견을 나누었고 ‘아,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 시대에선 모두가 똑같다. 오히려 우리가 유리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또 일이 되려고 하니까 오명 씨가 동아일보 사장이 되었어요. 오명 당시 동아일보 사장을 찾아갔죠. 신문사끼리 담쌓고 지내지 말고 정보화 운동같이 하고 사설도 같이 쓰자고 했습니다. 신문업계에선 라이벌이지만 정보화만은 같이 뜁시다라는 뜻이죠.

1997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신문사 공동 캠페인이 전개됐습니다. 이 관계가 그리 오래가진 않았지만, 사설을 같이 쓴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죠.”

1999년5월26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제1회 조선일보 인터넷대상 시상식에서 이어령 심사위원장이 인터넷대상 수상자에게 상패를 수여한 뒤 축하의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축소지향의 일본'이라는 책을 출간하는 등 일본 사회에 대한 이해가 높습니다. 한국이 정보화에서 일본을 앞설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내가 말이죠, 공부는 참 잘했는데, 달리기는 밤낮 꼴찌였습니다. 한번은 비 오는 날 운동회에서 열렸는데, 달리기 트랙이 지워졌어요. 1등으로 뛰던 놈이 트랙을 잘못 보고 엉뚱한 곳으로 계속 달리는 거에요. 앞선 주자들이 다 1등을 따라가 버리니, 나중에 따라가던 내가 1등을 했습니다. 그때 그 생각이 났습니다. ‘아, 오히려 늦게 갔기 때문에 제대로 코스를 갈 수 있었구나.’

당시 우리나라는 전화망으로 쓰인 구리 망이 그렇게 촘촘하지 않았어요. 동축 케이블을 까는 와중에 광케이블이 나와 더 좋은 걸로 갈아탔습니다. 산업화는 일본보다 늦었지만, 늦었기 때문에 오히려 앞서갈 수 있었던 겁니다.

반면, 미국이나 일본처럼 산업화를 마친 다른 나라들은 어떻습니까. 이미 땅속에 구리로 만든 케이블이 잔뜩 깔렸습니다. 짐바브웨가 구리 생산량으로는 전 세계에서 순위를 다투는 국가인데, 뉴욕 전역에 깔린 구리 양이 짐바브웨 땅속에 묻혀있는 양보다 많다고 하잖아요.

산업화를 이룬 나라들은 동축 케이블을 걷어내고 광케이블을 깔기가 어려웠어요. 막대한 돈도 돈이지만, 사업권을 선점한 기업 간 이해관계도 복잡하죠.

일본은 당시 초기 초고속통신망으로 ‘근거리 ISDN’ 방식을 썼습니다. 이 방식은 빠르긴 한데 광케이블이랑 달리 근거리 밖에 사용을 못 해요. NTT(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는 동축 케이블에 선투자를 했기 때문에 광케이블을 새로 깔 엄두를 못 냈고 그저 낡은 방식을 개선해서 쓰려고 했던 거죠.

일본 정보화를 망친 3개 회사가 ‘3N’이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방송통신기술 부문의 NHK, 브로드밴드의 NTT, 그리고 운용체제(OS) 만드는 NEC(일본전기주식회사). 이 국영 회사들이 자기네 기준을 고집하다 정작 큰 변화의 순간에선 앞서 가질 못한다는 말입니다. 가령, NHK는 고해상도 방송 앞두고 아날로그식 고화질 TV만 고집하다가 디지털 방송이 늦어졌어요. 이 과정에서 몇 십조원 손해를 입었구요.”

이 전 장관은 '아듀 20세기(조선일보 문화부·1999)'를 책으로 묶으면서 서두 '20세기 송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아듀 20세기. 이제 우리는 더 이상 20세기의 지각생도 퇴교생도, 그리고 모범생이나 벌서는 학생도 아니다. 이제 파란 빗자루를 잡고, 너와 내가 함께 살던 20세기를 쓰는 거다. 그리고 지금 바로 바깥에서 큰기침을 하며 서성대는 21세기, 새천년의 시간을 위해 대문의 빗장을 여는 거다.’

2008년 8월 6일 오전 서울 코리아나 호텔에서 열린 만해축전에서 이어령 전 장관이 고은 시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