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문턱에 있는 한국에서 세계를 이끌 과학 인력 양성은 정책 1순위다. 본지가 한국고등교육재단과 함께 해외 명문 대학 연구진으로 활약하는 한인 석학(碩學)들을 초청, 서울 테헤란로의 재단 빌딩에서 '창조적 미래를 여는 과학기술의 혁신'을 주제로 간담회를 열었다.

1시간 30분 동안 이어진 간담회에서 과학 부국(富國)을 위한 제언들이 쏟아졌다. 이들은 "이제 남들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 과학계에 화두를 던질 수 있는 연구자를 배출해야 한다" "월드컵 16강을 바라듯 노벨상을 눈앞의 목적으로 삼지 말고 일단 우수한 과학자층을 두텁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날 신석민 서울대 화학부 학부장이 사회를 봤으며, 하택집 일리노이대 물리학과 교수, 박홍근 하버드대 화학·물리학과 교수, 이진형 스탠퍼드대 신경과학·생물공학과 교수, 이대열 예일대 신경생물학·심리학과 교수 등이 참석했다.

해외 한인 과학자들이 7일 낮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국고등교육재단에서 ‘과학 부국(科學富國)’을 달성하기 위한 제언(提言)을 쏟아내고 있다. 왼쪽부터 이대열 예일대 신경생물학·심리학과 교수, 이진형 스탠퍼드대 신경과학·생물공학과 교수, 박홍근 하버드대 화학·물리학과 교수, 하택집 일리노이대 물리학과 교수, 신석민 서울대학교 화학부 학부장(사회자).

―최근 떠오르는 첨단 과학을 소개해 달라.

이대열 "떠오르는 분야 중 하나가 뇌과학이다. 공교롭게도 오늘 오신 교수님들의 학부 배경은 물리학, 화학, 경제학 등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뇌과학과 관련돼 있다. 인간을 연구하는 분야 중에 가장 역동적이고 구조적으로 복잡한 것이 뇌과학이다. 수명이 늘어날수록 이 분야 연구가 필요하다. 인간의 뇌를 자세히 연구하게 되면, 이를 이용할 수 있는 분야가 교육·IT산업 등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방대하다."

하택집 "요즘 사회적 문제 중 하나가 인구 고령화이며, 여기서 파생되는 문제가 치매 같은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는다면 한국 과학이 세계적으로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최근 융합연구 트렌드는 어떤가.

이진형 "요즘 한국에서는 '융합'이란 틀을 만들어놓고 무엇인가를 하라고 한다. 그러면 오히려 창조성을 저해할 수 있다. 인위적인 '융합'은 창조성 원칙에 어긋난다는 얘기다."

박홍근 "동감한다. 융합은 자기 분야에서 기본 역량을 키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분야로 가는 자유로움을 말한다. 한국 사회의 융합은 너무 작위적인 의미로 쓰인다. 예컨대 나노사이언스가 뜬다면 한국에서는 관련 과들을 합쳐서 나노사이언스과를 만든다. 그 순간 융합이 아니다."

이진형 "결국 한 명의 연구자가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유롭게 연구하는 문화를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과학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보나. 우리의 염원인 과학 분야 노벨상을 타려면 어떤 지원이 필요할까.

하택집 "노벨상을 언제 받느냐고 채근하는 것은 무턱대고 월드컵 16강에 진출하라는 것과 똑같다. 이영표 해설위원이 '월드컵에 올인하는 게 아니라, K리그 중계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월드컵 시즌에 감독, 대표선수 선발에 신경 쓰는 것은 이미 늦은 것이다. 좋은 선수층이 늘어나면 당연히 성적이 좋아진다. 노벨상도 마찬가지다. 과학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우수한 과학자들을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다."

박홍근 "노벨상을 누가 탄다고 생각하나? 남들이 자기를 따라 할 수 있게 해야 노벨상을 탈 수 있다. 유행, 트렌드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남들이 하지 않은 전혀 다른 분야를 하는 것이 이노베이션(innovation·혁신)이다. 우리 과학 수준을 보면 지난 10년, 20년 사이에 엄청 발전했다. 잘하는 분들 정말 많아졌다. 그렇다고 세계적으로 화두를 주도하는 분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잘 모르겠다."

이대열 "외국에서는 자기 학과에서 최고의 학자를 뽑기 위해 다 같이 노력한다. 국내 교수님들은 그런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면 동료 연구진이 잘했을 때 자신에게 오는 인센티브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다 보니 자기 과에 정상급 학자들을 영입하는 것에 소극적이다. 제도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지난 10여년간 벌어진, 최고 수재들의 의대 진학 열풍에 대한 생각은?

이진형 "흔히 과학 전공자가 의대를 간 사람보다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공계를 전공하면 대기업에 들어가서 밤새 야근을 하는 반면 의대를 나오면 훨씬 편하게 잘산다고 본다. 미국에서도 의대가 인기지만 '의대를 왜 가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좋은 기술을 개발해 벤처기업으로 큰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한국에도 그런 문화가 들어와야 한다."

이대열 "학생들이 의대를 선호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결과물이다. 대학원 가서 연구하는 모습, 직장에서 고생하는 모습 등을 보면서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필요한 과학자를 많이 배출하려면 그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진형 "성공한 과학 연구자 롤(role) 모델을 우리 사회가 자꾸 조망하는 게 중요하다."

―한국 사회와 정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대열 "단기 성과에 급급하지 않았으면 한다. 좀 더 올바르게 과학자들을 평가하고 발굴해야 한다. 또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학 정책이 확확 바뀌는 것도 문제다."

박홍근 "유망한 젊은 연구자를 뽑을 수 있는 리뷰어(reviewer·평가자) 그룹도 중요하다. 그들이 공정하게 젊은 분들을 뽑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선 리뷰어 그룹에 전문가들이 없는 경우가 많다. 사심 없이, 젊고 유능한 과학자를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신석민 "우리 과학계가 더 이상 누구를 쫓아만 가는 상황은 아니다. 옛날처럼 어디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외국 경쟁자들과 같이 뛰는 형국이다. 이들을 뒤에서 밀어주고, 지원하는 사회 분위기와 시스템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