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작년 11~12월 이탈리아 연구진과 함께 남극 지하 80m에서 빙하 코어(glacier core·땅속 빙하에서 떼낸 얼음 덩어리)를 시추했다. 지금까지는 미국·일본 등 해외에서 빙하 코어를 들여와 연구하다 처음으로 자체적으로 빙하를 시추한 것이다. 이 빙하 코어는 인천 송도의 인천경제자유구역에 있는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부설 극지연구소에서 보관·분석 중이다. 극지연구소는 빙하에 함유된 물질을 분석해 300년 전의 기후 환경을 연구하고 있다.

기후변화가 그대로 기록된 빙하 코어

지난 26일 찾은 극지연구소 1층에는 두꺼운 철문으로 굳게 닫힌 공간이 있었다. 극지연구소 강정호 박사는 "이 안은 영하 20도여서 들어가기 전에 꼭 패딩 점퍼, 장갑, 귀마개를 착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두꺼운 겨울옷을 껴입은 뒤 두 개의 철문을 열고 빙하 보관소로 들어가니 혹한의 추위가 엄습했다. 보관소 안 냉동고에는 길이 55㎝의 원통형 얼음 덩어리 형태로 된 빙하 코어 수십 개가 밀봉된 채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포장 위에는 언제, 어디서 시추된 빙하인지 적혀 있었다. 빙하 코어를 꺼낼 때는 장갑 위에 다시 비닐장갑을 껴야 했다. 오염 물질이 묻으면 제대로 연구도 못 하고 폐기해야 하기 때문.

극지연구소에서 강정호 박사가 남극 빙하에서 채취한 빙하 코어를 들고 설명하고 있다. 빙하 코어에는 빙하가 형성될 당시의 먼지, 화산재, 미세 먼지 등이 포함돼 과거의 기후, 환경 변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우리나라는 올 2월 남극 내륙에 장보고 과학기지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빙하 연구에 나섰다. 남극 빙하는 지구 상에서 일어난 기후변화를 고스란히 담은 '역사책'이다. 수만년 전부터 남극에 내린 눈은 인간의 손을 타지 않고, 녹지도 않기 때문에 빙하로 굳는다. 10만년 된 눈 위에 1만년 전에 내린 눈이 쌓이고, 다시 100년 전 눈이 층층이 쌓인 셈이다. 눈은 대기의 먼지, 화산재, 우주 물질, 중금속 등 대기 환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눈의 결정(結晶)에 포함된 채 그대로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지하 3400m에 있는 빙하는 100만년 전에 내린 눈이 쌓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빙하 속에 보존된 이산화탄소 농도와 미세 먼지 등을 분석하면 과거 지구 온도는 어땠는지, 빙하기와 간빙기 사이에 온난화가 얼마나 진행됐는지 등을 알 수 있다. 대형 화산활동이 있거나 큰 기후변화가 생겨도 빙하에 고스란히 기록된다. 한 빙하 코어에는 얇고 투명한 선이 보였다. 강 박사는 "1810년에 탐보라 화산이 폭발했는데, 당시 폭발 영향으로 레이어(선)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변화로 환경오염까지 예측

우리나라는 단순한 기후변화뿐만 아니라 이를 일으키는 환경오염 연구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과거 빙하 코어를 분석해보면 이산화탄소 농도가 크게 높지 않다가 1800년대를 지나면서 농도가 급상승한다. 이는 산업혁명으로 생산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대기오염도 심해진 것과 관련이 있다. 강정호 박사는 "빙하를 녹인 물을 원소별로 분석해보면 산소 동위원소의 비율이 서로 다르다"며 "이를 현재 대기 상태와 비교해 지구온난화 진행 상황, 향후 과정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빙하 속에 포함된 미세 먼지 역시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상태를 보여준다. 빙하기에는 바람이 강하기 때문에 남극까지 미세 먼지가 날아온다. 간빙기는 그 반대다. 따라서 빙하 속의 미세 먼지 농도를 비교하면 빙하기·간빙기 여부를 알 수 있다. 또 미세 먼지에 붙어 있는 오염 물질, 중금속 농도는 당시 대기의 질(質)을 보여준다.

빙하 코어(glacier core)

남극이나 북극에서 수백~수천년 간 녹지 않고 쌓여온 빙하를 땅속 깊은 곳에 파이프를 박아서 석유 시추하듯이 채취한 것. 빙하가 형성될 당시의 먼지, 화산재, 우주 물질, 중금속 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일종의 ‘냉동 저장고’다. 과거의 기후·환경을 연구하는 데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