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낮 부산 영도구에 있는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장비 보수 작업장에서는 800여개 용접기의 녹을 제거하고 기름칠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선박 건조용 후판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라인에서는 녹슨 설비를 들어내고 새 설비로 교체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독(dock·배 만드는 작업장) 옆 공터에서는 직원들이 건설 장비를 이용해 쌓여 있던 폐기물을 치우고 땅을 평평하게 다지고 있었다.

영도조선소 곳곳에서 이런 '대청소'가 벌어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한진중공업이 다음 달 1일부터 32개월 만에 처음으로 상선(商船) 건조를 재개하기 때문이다. 터키의 선주(船主)가 지난해 10월에 발주한 18만t급 벌크선(석탄·곡물 등을 나르는 화물선)이다.

3년여 만의 商船 건조

3년 가까이 멈춰 있던 상선 생산라인 재가동을 앞두고 영도조선소에는 활기가 넘친다. 일감이 없어 휴직 중이던 350여명의 생산직 직원 중 80여명이 상선 건조를 위해 최근 복귀했다. 선박블록 제작 업무를 맡은 심모(58)씨는 "휴직하던 10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말했다. 설계실에서는 170여명의 기술자가 건조를 시작할 벌크선의 설계 도면을 최종 점검하고 있었다. 조현찬 설계실장은 "이달부터는 야간작업에 주말 특근까지 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 영도구 한진중공업 근로자들이 13일 독(dock·배 만드는 작업장) 안에서 다음 달 1일부터 32개월 만에 처음으로 재개하는 상선(商船) 건조의 성공적인 작업을 다짐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최성문 한진중공업 사장은 "상선 생산라인 재가동에 앞서 그동안의 공백을 최소화하는 게 큰 숙제"라고 말했다. 블록 탑재 부분에서 근무하는 윤재웅 차장은 "기계는 며칠만 안 써도 정비할 부분이 생긴다"며 "2년 넘게 사용을 안 한 탓에 손볼 곳이 많다"고 말했다. 용접 기술자 150여명은 지난달부터 기술연수원에서 한 달 반 과정으로 용접 기술 재교육을 받고 있다.

영도조선소에서 상선 건조는 2011년 11월 유조선을 선사에 인도(引渡)한 게 마지막이었다. 세계 경기 침체 여파로 조선 경기가 가라앉아 2008년 9월 이후 수주가 끊긴 탓이다. 방위산업 물량 일부를 처리하며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노사 갈등도 수주 부진의 중요 요인이었다. 2010년 말 회사 측이 구조조정을 시작한 데 대해 노조는 총파업에 돌입했다. 회사가 2011년 11월 해고자 전원을 재고용하기로 결정하면서 파업은 끝났지만 일감이 없어 생산직 직원들은 유급 휴직에 들어갔다. 한진중공업이 부활의 신호탄을 쏜 것은 작년 7월 한국전력 발전 자회사 5곳이 주문한 유연탄 수송용 벌크선을 수주하면서부터다. 4년10개월 만의 수주였다. 최성문 사장은 "이 수주는 노조 측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노조 측이 발주처에 "회사와 협력해 해당 선박을 노사 분규 없이 최고의 품질로 제작해 제때에 납품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문건을 보내 높은 점수를 딴 것. 회사도 영업망을 총동원해 작년 하반기부터 올 4월까지 유조선·벌크선 등 총 17척, 8억달러어치를 수주해 2016년까지 일감을 확보했다. 에코 십(ecoship·친환경 선박) 등 고부가가치 기술도 수주에 도움이 됐다.

주변 商圈과 일자리 창출 '기폭제'

영도조선소의 조업 재개로 지역 상권도 기대감에 부풀고 있다. 박인호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 상임의장은 "한진중공업이 살아나면 조선기자재 등 관련 기업들에도 온기(溫氣)가 퍼지고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한진중공업 정문 인근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는 이창현(61)씨는 "최근 매출이 작년보다 30~40% 늘었다"며 "이달 안으로 직원을 2명 더 뽑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선업 호황 시절 부산·경남 일대의 조선 기자재 업체들은 영도조선소에 연간 1조원 정도의 납품 실적을 올렸다. 하지만 한진중공업 매출이 당시의 3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하면서 이들도 직격탄을 맞았다. 한진중공업 협력업체 건우선박도장의 이종포 사장은 "호황 때에 비해 매출은 90% 정도, 직원은 80% 정도 줄었지만 이제 최악 상황은 지나고 좋은 일만 생길 것 같다"고 말했다.

한진중공업 관계자는 "협력업체들이 내년 초까지 1000여명을 뽑아 지역 상권은 물론 일자리 창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영 악화로 고전(苦戰)하던 다른 중형 조선업체들도 재기에 나서고 있다. 경남 통영 성동조선해양의 경우 올 들어 이달 현재 1조6000억원 상당을 수주, 지난해 전체 수주액(2조원)에 근접하고 있다. 올해 선박 수주 척 수(29척)만 놓고 보면 세계 3위에 해당하는 실적이다. 지난해 40여척을 수주해 2016년까지 일감을 확보했던 SPP조선도 선주의 건조 요청이 쇄도해 가격 조건 등을 놓고 협상을 벌이고 있다.

홍성인 산업연구원(KIET) 박사는 "중형 조선소들이 불황기에 살아남으려면 석유화학 제품 운반선처럼 대형업체들이 만들지 않는 분야에 특화해 차별화된 성과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