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쓸 때 내 마음 속에는 두 가지 바람이 자리했다. 첫째는 대한민국만의 라이프스타일과 각 도시의 정체성이 확립되기를 바랐다. 둘째는 그 정체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업이 각 도시에 뿌리를 내려 마침내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길 바랐다.”

신간 ‘작은 도시 큰 기업’의 저자 모종린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책 머리에 집필 동기를 이렇게 밝힌다. 요컨데 ‘대기업을 유치한 작은 도시들의 비밀 탐구’가 목적이다. 이를 위해 1년 동안 7개국 11개 도시를 돌아본 후 일종의 견문 보고서를 내놨다. 어떻게 그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인 중소도시에 충분히 만족해하며 여유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걸까.

저자가 찾은 답은 이렇게 요약된다. “그들이 사는 도시는 비록 ‘작은’ 규모지만 그 속에는 세계적인 ‘큰’ 기업이 있다. 탄탄한 산업 기반은 그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고, 그 도시의 정체성을 고수하고 지켜나가는 지역문화는 다시 기업에 창의적인 영감을 제공한다.”

저자는 “그들의 생태계가 부러웠다”고 적었다. “작은 도시지만 세계적인 기업을 유치한 데서 우러나는 당당한 자신감도 부러웠다. 그 자신감을 우리나라에서도 찾고 싶다”고 희망했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더 들어봤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도시에 관한 책들이 국내외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공교롭게 내 책도 이번에 '뜨는 도시 지는 국가'라는 번역서와 같은 시기에 출간되면서, 언론 서평에 '국가 대 도시'라는 구도 속에서 소개가 됐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이제 변화의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도시이고, 도시 중심으로 문제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내 책은 그런 얘기가 아니라, 순전히 지역균형 발전의 한 대안으로 쓴 것이다. 지역균형 발전의 해법이 도시의 라이프 스타일, 문화 정체성에 있다는 얘기다."

-지역균형 발전이라면 새삼스런 얘기도 아닌데.
"그동안 지역균형 발전을 얘기할 때마다 주로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물질적 조건, 이를 충족하기 위한 재정이나 자원 분배에만 신경을 썼다. 다른 한편, 보수 진영 학자들은 '서울 하나 키우기도 힘든데 무슨 균형 발전이냐'는 식으로 무관심하거나, 대안을 내놓는 경우에도 그저 '지역이 자력 갱생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내 책은 지방이 독자적인 성장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물이다."

-방문 도시는 어떻게 선정했나.
"세계 굴지의 다국적 기업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도시에서 시작한 것들을 찾아 봤다. 그 나라의 수도나 중심 도시가 아닌 중소 도시 중에서 세계적 기업을 낳은 사례를 찾아 11곳을 골라 직접 찾아가 봤다. 이 도시에는 뭐가 있길래 성공할 수 있었는지 살펴본 것이다."

-성공한 도시들의 비결이 뭔가.
"정신적인 것, 문화적인 데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문화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도시의 정체성이다. 이해하기 쉽게 '그 도시만의 매력적인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 지역 사람들이 자기 도시는 다른 곳과 다르다는 차별성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애착과 충성심을 갖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지역 단위의 문화적 정체성이 약하다. 있더라도 옛날보다 점점 더 약해지는 상황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정치적 지방색이나 지역의 집단 이기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문화적 정체성이다. 서울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고, 이 다른 삶이 의미있고 중요하고 매력적이라는 자각을 갖는 것을 말한다. 또한 자족에만 끝나지 않고 이를 활용해 사업 기반도 만들고 세계화에도 연결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기준에 잘 맞아 떨어지는 도시도 있고, 다소 무리가 있는 도시도 있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주제에 가장 부합하는 도시를 꼽자면.
"각 도시마다 상이한 스토리가 있고, 우리한테 주는 교훈도 다르다. 크게 전통 도시, 산업 도시, 하이테크 도시로 구분할 수 있다. 안동이나 전주 같은 전통 도시, 역사적인 도시들은 교토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세계적인 역사 도시이면서 세계적인 기업 생태계를 구축한 도시다. 산업 도시 모델로는 맨체스터가 있다. 우리 경우 창원이나 포항, 울산 같은 제조업 기반 도시들이 참고할 필요가 있다. 맨체스터는 산업혁명 이후 섬유산업으로 발달한 도시인데, 도시 정체성에 걸맞는 최대 협동조합이 있었다. 하이테크 도시로는 오스틴이나 팔로알토를 들 수 있다. 오스틴 경우 주정부나 텍사스대학을 중심으로 하이테크 산업을 최근에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끝으로 하나 더 추가하자면 현대문화 도시를 들 수 있다. 부산이나 통영, 제주가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현대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 가려는 도시들이다. 포틀랜드나 시애틀이 모델이 될 수 있다. 강릉도 요즘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 커피를 접목시켜 광화문에 테라로사 서울 분점을 냈다. 이런 도시들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노력하는 도시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책에 나온 도시들은 이들이 벤치마킹할 수 있는 도시들라고 생각한다.

-도시와 기업의 관계는 어떻게 봐야 하나?
"시애틀의 예를 들어보자. 1970년대 시애틀 인구가 35만명일 때 보잉이 10만을 고용했을 정도로 중추적인 기업이었다. 하지만 거의 망하게 돼 3분의 2를 해고했다. 도시 전체가 무너질 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시애틀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새로운 첨단 산업이 들어와 회생했다."

-그런 경우 기업이 도시에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정책인가, 문화인가.
"여러 요인이 있다. 당시 연방정부도 도와줬지만, 항만운영회사도 버팀목이 됐다. 기본적으로는 파이오니어스퀘어를 중심으로 도시 문화와 역사를 보존하려는 운동이 시작됐다. 보잉에서 해고 당한 사람들도 도시를 떠나지 않고 거기에서 새 비즈니스를 찾았다. 스타벅스부터 벤처캐피탈리스트, 노동단체, NGO, 기업가들이 도시를 지키고 키웠다."

-여전히 도시의 정책과 문화 간의 인과 관계가 불분명해 보인다.
"포틀랜드 경우 정책이 중요했다. 시 위원회가 집단지도체제로 시정을 슬기롭게 운영했다. 월마트 같은 대형유통업체가 못 들어오게 막고, 지역 독립 소상인 중심으로 발전시켰다. 맨체스터도 그런 측면이 있다. 하지만 두 도시 정도 말고는 라이프스타일이란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도시의 정체성이 우선이고, 물질적 조건이나 객관적 조건은 그 다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정체성이 강한 도시가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성공 사례로 든 도시들의 경우 지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뚜렷하다. 중심 도시와는 확실히 다르다."

가령, 팔로알토 역사를 보면 원래 경쟁 목표가 뉴욕이었다. 60년대 권력으로부터 해방을 지향하는 히피 정신이 실리콘밸리의 IT단지를 낳았다. 이들에게는 하이테크 기술을 통해 이루려는 삶의 이상이 있었다. 그런 게 우리 도시나 기업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삼성이 첨단 기술을 통해 자기네가 만들고 싶은 세상이 있나? 그냥 시장의 지배력을 추구하는 것 아닌가. 뭔가 다르게 살겠다는 욕구, 이게 정체성이다. 실리콘밸리가 성공한 이면에는 기성 조직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스럽게 살겠다는 정신 문화가 바탕이 돼 있었다.”

-도시 문화가 기업을 끌어들이기도 하지만, 기업이 도시 문화를 형성하는 경우도 많지 않나.
"기업이 도시 문화에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기업과 지역의 라이프스타일이 연결이 돼야 한다는 점이다. 수원에 삼성이 큰 연구소는 만들었지만 협력적인 기업은 안 생기고 있지 않나. 내가 말하는 도시 문화는 기업이 없어도 새로운 기업을 만들어낼 정도로 매력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말한다. 오스틴만 보더라도 홀푸드가 도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는 않다. 오스틴의 정체성을 좌우하는 것은 오히려 세계 최고 음악 축제와 텍사스대학 같은 것들이다."

-도시의 문화도 결국 일자리가 있고 경제적 수입이 있고 주민 생활에 여유가 있을 때 생기는 것 아닌가.
"우리나라는 경제 수준이 올라갔는데도 각 도시의 라이프스타일이라 할 만한 게 안 나오는 게 문제다. 울산을 가 봐도 안 보인다. 그런데도 계속 지방에서는 중앙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지방 학생들은 다 서울로 올라오고 있다. 자생적으로 남아서 서울과도 경쟁할 만한 기업을 만들어야는데 안되고 있다. 오스틴은 홀푸드나 델이 생기기도 전에 가고 싶은 도시였다. 시애틀도 포틀랜드도 그랬다. 도시의 자생적인 매력이 있기 때문에 기업도 가고 산업화할 수 있었다."

-국내 지자체들은 지금도 기업 유치를 위한 정부 지원, 규제 완화 같은 것을 요구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지역이 발전을 위해 특혜만 요구할 게 아니라, 각 지역의 라이프스타일에 기반한 새 전략을 짜자는 것이다."

-안동을 가보면 조선시대 각 문중에서 전해오는 책판을 볼 수 있다. 지식문화 전통이 엄청난데 이런 자산을 활용해 사업으로 키워가면 어떨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안동의 경우 전통적인 대가족 문화를 유지해서 그런 문화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특화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한문 교육을 복원하는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지금은 한문 르네상스 시대다. 유교를 놓고 한•중•일 아시아 삼국이 경쟁하는 상황이다. 안동이 유교 교육 문화를 토대로 세계적 기관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도 기업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나.
"지역 주민들이 나서야지, 삼성이 가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책에서 말한 '작은 도시'에서 서울은 논외인가.
"사실 서울도 많은 지역을 품고 있는 큰 도시로 볼 수 있다. 각 지역들이 새로운 산업을 유치하고 일자리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점에서 지방의 소도시들과 사정이 다르지 않다. 그리고 새로운 기업 창출은 현재 우리나라 전체가 안고 있는 숙제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연방제로 갈 것 같지도 않고, 전국 주요 도시에서 모두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단지 지방의 몇 개 도시라도 자신만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을 갖고 서울과 경쟁해서 기업도 만드는 곳이 나타났으면 한다. 그게 진정한 지역균형 발전이라 생각한다. 최소한 10~15개 도시에서는 장기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 지자체 중에 그런 싹이 보이는 곳이 있나.
"제주가 가장 가능성 높다고 본다. 제주 삼다수처럼 토착 성공 기업을 키워야겠다는 노력이 있다. 아모레퍼시픽과 다음, 넥슨 같은 하이테크 IT 기업들도 제주로 내려가서 뭔가 해 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대부분 외부 이주민이 와서 만든 것이지, 도민이 만든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부산도 해운대를 중심으로 제 2 금융 중심이 되겠다는 의욕을 보이고 있다. 방향만 잘 잡으면 상하이나 홍콩 같은 국제적 금융 도시로 갈 하드웨어는 충분히 있어 보인다. 전주나 안동은 교토처럼 갔으면 한다."

-책에는 지자체들이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아 보인다. 도시 발전을 위한 해외 견학 보고서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 집필 의도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책 내용의 순서도 가서 여행하기 좋게 나눴다. 두 도시를 묶어 한번에 같이 갈 수 있게. 모쪼록 독자적인 발전을 꿈꾸는 지방 도시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