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는 세계 곳곳에 실리콘밸리를 벤치마킹한 IT 혁신 단지가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구글과 페이스북, 애플 등 다수의 글로벌 IT공룡을 키워낸 미국의 실리콘밸리는 세계 ‘IT 산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한동안은 실리콘밸리 출신 개발자와 창업자들이 세계 IT 흐름을 주도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세계 곳곳에 실리콘밸리를 벤치마킹한 IT 혁신 단지가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인터넷 초기 웹브라우저 넷스케이프의 선구자인 마크 앤드리슨은 지난달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50가지 종류의 새로운 실리콘 밸리가 생길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실제 차세대 실리콘밸리로 지목된 도시는 20곳이 넘지만 최근 IT 관계자들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도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와 독일 베를린, 중국 베이징이다.

최근 벤처투자자들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차세대 미국 벤처 허브는 LA다. 바다를 끼고 있는 LA는 ‘실리콘비치(Silicon Beach)’라는 명칭을 얻으며 투자자를 끌어모으고 있다. 실제 지난 몇 년간 LA에서는 10대들이 좋아하는 모바일 메신저 스냅챗, 친구찾기 애플리케이션(앱) 틴더, 익명 메신저 위스퍼, 가상현실 기술업체 오큘러스 VR, 헤드폰업체 비츠 등의 IT 기업들이 생겨났다.

미국 LA에서는 헤드폰업체 비츠, 가상현실 기술업체 오큘러스 VR, 모바일 메신저 스냅챗 등이 탄생했다.

시장조사업체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에 따르면 2011년부터 LA 지역의 벤처기업 800개가 유치한 벤처투자액은 13억달러에 달한다. 기업 데이터업체 컴파스는 2012년LA를 실리콘밸리와 이스라엘 텔아이브에 이어 3번째로 IT 생태계가 가장 발달한 지역으로 꼽았다. 미국 타임지는 “최근 LA의 유명 해안가인 베니스 비치에 신생 벤처기업이 모이면서 지역 부동산 가격도 치솟고 있다”고 보도했다. 구글과 페이스북도 이 지역에 새 사무실을 열었다.

LA 소재의 벤처기업들은 LA라는 대도시에 몰리는 자본과 헐리우드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타임지는 “최근 헐리우드 배우와 연예인들 사이에서 앱이나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에 투자하는 것이 유행”이라고 설명했다. 여배우 제시카 알바, 케이트 보스워스, 메리 케이트 올슨 등이 벤처기업에 투자하거나 공동창업했다.

또 미디어 산업이 발달해 영상·스트리밍 기반 창업이 수월하다는 장점도 있다. 미국의 벤처캐피탈 그레이크로프트 파트너스는 “헐리우드 덕에 발달한 TV와 영화제작 기술이 관련 창업에 활용되곤 한다”고 말했다.

독일 베를린은 유럽 내에서 개방적인 창업문화와 비교적 저렴한 부동산 가격으로 SNS 기반 벤처기업을 끌어들이고 있다.

독일 베를린은 유럽 내에서 개방적인 창업문화와 비교적 저렴한 부동산 가격으로 SNS 기반 벤처기업을 끌어들이고 있다. 누구나 음악을 만들어 공유할 수 있는 음악 SNS ‘사운드클라우드’도 스웨덴에서 탄생했지만 본사를 베를린으로 옮긴 후 성공을 거두었다. 사운드클라우드의 공동창업자 에릭 왈포스는 “베를린이 음악 사업에 적합한 창의성과 활력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해 옮겼다”고 말했다.

소셜게임업체 ‘우가’, 과학자들을 위한 네트워킹 사이트 ‘리서치 게이트’, 3차원 비디오 메시지를 만들 수 있는 앱 ‘주비’ 등 다양한 SNS 기반 벤처기업이 베를린에서 탄생했다. 이들 모두 공통적으로 “베를린은 유럽 내 다른 도시들이 지니고 있지 않은 혁신성과 활력을 띄고 있다”며 “샌프랜시스코나 런던에 비해 방값이나 사무실 빌리는 가격이 훨씬 싸다”고 입을 모았다.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중국 베이징의 중관춘(中觀村)은 겉보기에는 서울 용산 전자상가와 닮아있다. 카메라나 전자제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상점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곳에서 세계 유수의 인터넷 기업 1만여개가 탄생했다. 중국 대표 PC 제조사 레노보도 중관춘의 허름한 가옥에서 벤처기업으로 시작했다.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중국 베이징의 중관춘은 인터넷 기업 1만여개가 탄생한 중국의 '스타트업 허브'다.

중관춘규제위원회에 따르면 2011년 말 기준 중관춘에서 설립된 벤처기업은 4243개로, 같은 해 한국에서 새로 생긴 벤처기업의 2배에 달한다. 이 가운데 절반 정도가 34세 이하의 청년 창업인 것으로 집계됐다. 알리바바, 텐센트 등 중국 IT 기업의 성장과 최근 2년간 중국에 불어닥친 스마트폰 열풍을 감안하면 현재 벤처기업 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중관춘의 젊은 창업가들은 다양한 스마트폰 앱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관춘은 위치상 베이징대, 칭화대 등 중국 명문대와 가까워 우수한 인재를 영입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최근에는 투자자가 몰리면서 투자자 정보를 교환하는 창업 카페도 활기를 띄고 있다. 중관춘의 ‘가라지 카페’나 ‘3W 카페’에서는 매주 창업 교육 프로그램이나 유명 창업가의 연설을 들을 수 있다.

정부와 기업은 이 같은 차세대 실리콘밸리의 등장을 반기고 있다. 이들 도시들이 실리콘밸리에 제한됐던 IT 생태계를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실리콘밸리가 전세계 IT 중심지 위치를 유지하겠지만 세계 곳곳에 피어나는 차세대 실리콘밸리가 새로운 형태의 혁신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앤드리슨은 “앞으로는 한 분야에 특화된 다양한 실리콘밸리가 탄생할 것”이라며 “바이오테크밸리, 줄기세포밸리, 3D프린터밸리, 드론(무인기)밸리 등이 생겨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