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끈 것은 솔직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역설적이지만 불안감은 나를 부지런하게 만들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했다.

1996년 1월 일이다. 칠순 초반에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일주일 만에 회사에 출근했다.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그간 결심했던 사표를 냈다. 지금의 CJ인 당시 제일제당에서 차장으로 전략 기획 업무를 맡았던 나는 콘텐츠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본격적으로 해당 업무를 배워보고 싶어 음반 회사로 자리를 옮기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살을 에는 날씨에 회사 문을 열고 나오는데 여러 생각이 스쳤다. 나는 뭔가? 딸린 식구가 셋.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장사꾼 체질은 아니다. 누구에게 물건 하나 팔아본 적 없다. 돈 되는 자격증도 없다. 변호사도 아니고, 회계사도 아니다. 그렇다고 기술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외국어도 신통치 않다. 체구가 작아 몸으로 먹고살기도 어려웠다.

그때 나는 알량한 일류 대학만 나왔을 뿐 사회가 알아주는 주특기는 없었던 것이다. 직장에 다니면서 나는 누군가 자료를 가져오면 그것을 정리하고 얄팍한 보고서를 꾸미는 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조직에서는 그런 일을 기획 업무라고 불렀다. 대단한 브레인 업무인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조직을 떠나고 나니 내가 한 일이란 게 아무런 범용성이 없는 잔재주에 지나지 않았다.

서울 중구 유원빌딩에 있는 유암코(연합자산관리) 본사 내 직원 도서관에서 인생 경험을 들려주고 있는 이성규 유암코 사장. 유 사장은“젊을 때 치열하게 산 덕분에 기업 구조조정 분야의 특기를 갖게 됐고 이게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며“성과 앞에 겸손하면서 계속 정진하는 자세를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찬 바람을 맞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은 하나였다. 시장이 알아주는 전문 영역을 쌓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건 내 브랜드로 삼고 나 자신을 포장할 수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이때가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기 1년여 전이었다.

이런 생각 끝에 옮겨 갔던 게 음반 회사인 한국EMI였다. 내 이력을 알고 있던 지인들은 내 선택에 하나같이 놀라움을 나타냈다. 상대를 나와 딱딱한 일만 해왔던 이전 경력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내 첫 직장은 대학원 졸업 후 들어간 한국신용평가였다. 이곳에서 10년간 기업의 재무제표 등을 분석해 기업 신용도를 평가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면서 실제 기업은 내부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 곳인지 궁금증이 생겼고, 1994년 제일제당에 들어갔다. 여기서 전략 기획 업무를 맡아 회사가 엔터테인먼트 분야로 확장해 나가는 과정의 일부를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콘텐츠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고 이를 풀기 위해 음반회사로 옮긴 것이다.

음반 회사에서 나는 의외의 깨달음을 얻었다. 기업의 가치는 재무제표 같은 문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는 진리였다. 자산이 얼마나 많은지, 부채 부담이 얼마나 적은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기업의 미래를 결정하는 지적 가치가 핵심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깨달음 끝에 나는 기업 가치 분석을 특기로 삼자고 결심했다. 이즈음 우리나라엔 전대미문의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쳤다. 그리고 한국신용평가 재직 시절 사장으로 모셨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로부터 연락이 왔다. 외환 위기로 무너진 기업 구조조정 임무를 부여받고 금융감독위원장이 됐는데 도와달라는 것이다.

헝가리의 에세이스트 죄르지 콘라드는 "용기란 작은 걸음의 축적"이라고 했던가. 나는 이 제의에 미련 없이 응했다. 신용 평가 회사와 대기업 그리고 콘텐츠 회사를 돌면서 기업 분석에 실체적인 눈을 떴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1998년 봄 금융감독원에 계약직으로 들어갔고, 곧이어 금융감독위원회에 파견 업무를 나가 기업 구조조정 업무를 맡게 됐다.

신용 평가 회사에 있을 때 배워둔 기업 가치 분석의 세밀한 기법, 대기업에 있으면서 관찰했던 재벌 총수를 둘러싼 지배 구조의 작동 방식,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몸을 담으면서 깨달았던 지적 자산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 이런 편린은 어느새 기업 구조조정에 중요한 도구로 작용했다.

구조조정 업무는 지독했다. '구조조정은 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는 말이 맞았는지 스트레스로 위암에 걸려 위의 70%를 잘라냈다. 구조조정은 당하는 측이나 집행하는 측 모두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줬다. 내 주변의 여러 사람이 위를 잘라냈다.

업무를 시작하고 2년 뒤 '미스터 워크아웃'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구조조정을 부르는 위기는 늘 반복된다. 외환 위기가 터지고 10년이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닥쳤다.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은행들은 '유암코'라는 부실채권 정리 기구를 만들고, 나를 다시 불렀다.

유암코 사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변방으로 인식되던 NPL(부실채권) 시장은 규모와 질서가 있는 경쟁입찰 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내게는 '부실채권 전문가'라는 별명이 하나 더 붙었다.

첫 직장에서 조우한 멘토는 내게 이런 조언을 남겼다. "30대에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한다. 당신의 40대는 30대의 명성을 파먹고 사는 것이다. 당신의 50대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그 40대에 해놓은 것을 훑어 먹고 사는 것이다."

['미스터 워크아웃' 이성규 사장은]

1959년 충남 예산 출신. 서울사대부고, 서울대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1985년 신용 평가 회사인 한국신용평가에 들어가 10년간 기업 분석 일을 맡았고, 이후 제일제당과 한국EMI뮤직에서 일했다. 외환 위기 발발 후 금융감독위원장이 된 이헌재 전 부총리의 요청으로 금융감독원에 들어가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아 기업 구조조정 실무를 담당했다. 2000년 금융감독원을 떠나 서울은행 상무, 국민은행 부행장, 하나금융지주 부사장, 하나은행 부행장 등을 역임하며 금융권에서 10년간 일하다가 글로벌 금융 위기 때인 2009년 7월 만들어진 부실채권 처리 전문 회사 유암코(연합자산관리) 사장이 돼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