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범 3년째를 맞는 한국형 헤지펀드가 국내 증시의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 헤지펀드에서 주로 사용하는 ‘롱숏전략’은 공모펀드로까지 확대돼 증시 투자의 정석으로 자리매김했다. 롱숏전략이 대중화되면서 주가가 오를 종목만 찾던 투자문화도 바뀌었다. 그동안 매수(buy) 일색이었던 국내 증권사 리서치센터는 서서히 매도(sell) 보고서를 늘리고 있다. 장기간 박스권(일정 범위에서 지수가 오르내리는 것)에 갇힌 증시에서 헤지펀드가 주식형 펀드의 수익률을 압도하면서 헤지펀드가 노리는 ‘금리+알파(α)’의 수익률에 대한 인식도 호의적으로 변했다. 과거 20~30%의 대박 수익을 쫓던 투자자들은 고위험·고수익보다 중위험·중수익을 선호하고 있다. [편집자주]

삼성전자(005930)에 투자하고 있는 김모(43)씨는 작년 당혹스러운 경험을 했다. 삼성전자의 장기 성장 가능성을 보고 여윳돈을 투자했는데, 작년 6월 5일 152만원이던 주가가 7월 8일 121만원까지 떨어진 것이다. 주가가 곤두박질칠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당황한 김씨는 자신이 거래하고 있는 증권사의 프라이빗뱅커(PB)를 찾아가 이유를 물었다. PB는 헤지펀드의 공매도(주가 하락이 예상될 때 보유하지 않은 주식을 미리 빌려 파는 것)가 가장 큰 영향을 준 것 같다고 설명했다. 당시 삼성전자 매도 상위창구에는 JP모건과 모건스탠리 등 외국계 증권사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이 증권사들은 헤지펀드들에게 수수료를 받고 공매도할 주식을 빌려주는 증권사다. 만약 PB의 설명이 맞았다면 헤지펀드는 공매도로 약 한달만에 15% 가까운 수익을 올렸다.

정동익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 3월 18일 ‘미련이 상처를 남긴다’는 제목의 현대미포조선분석보고서를 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매일 같이 쏟아내는 수십건의 보고서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안 연구원의 보고서는 단연 눈에 띄였다. 그는 향후 6개월간 현대미포조선의 투자의견을 ‘매도(sell)’로 조정했다. ‘매도’ 의견을 담은 보고서가 1년에 한두건 나올까말까한 국내 증권사 리서치센터 실정을 감안하면 이례적이었다. 정 연구원은 “미포조선의 흑자전환은 오는 2015년 1분기에 가서야 가능할 것”이라며 “부정적 요인들을 감안하면 현재 주가 수준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해 투자의견을 ‘시장중립’에서 ‘매도’로 하향조정한다”고 설명했다.

헤지펀드가 바꾼 증시 문화다. 주가가 오를 주식에만 관심을 가졌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주가가 떨어질 만한 종목을 찾는 일도 중요해졌다. 국내 헤지펀드의 60% 이상이 사용하는 ‘롱숏전략’ 때문이다. 헤지펀드에서 사용하는 롱숏전략은 새로운 투자 트렌드로 국내 증시에 자리를 잡았다. 작년까지만해도 일반 투자자들에게 생소했던 ‘롱숏’은 투자 대상과 범위를 넓혀가며 진화하고 있다.

헤지펀드는 투자 수익에 대한 투자자들의 기대도 바꿔놓았다. 증시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지 못하는 답답한 박스권 증시에서도 롱숏전략을 사용해 ‘금리+알파(α)’의 수익률을 올리는 헤지펀드를 목격한 투자자들은 ‘대박 수익’이라는 환상을 버리고 저금리 시대에 맞게 중위험·중수익 상품으로 이동하고 있다.

◆ ‘롱숏전략’ 거센 열풍

롱숏전략은 주가 상승이 예상되는 종목을 미리 사들이고(롱·long), 반대로 하락이 예상되는 종목은 공매도 방식으로 팔아(숏·short) 수익을 내는 방식이다. 오를 종목은 사고 내릴 종목은 파는 것이다.

오를 만한 종목은 그냥 사면 되지만 내릴 종목을 팔려면 그 종목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내릴 종목이 없을 때는 빌려서 팔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주식을 빌리는 대주거래를 해야 한다. 이게 바로 공매도다.

이 때문에 공매도를 할 만한 종목이 뭔지를 찾는 것도 애널리스트의 과제에 들어가게 됐다.

증권사 한 리서치센터장은 “과거에는 종목에 대해 나쁜 의견을 내면 기관들이 싫어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 공매도 수요가 늘고 롱숏펀드가 성장하면서 ‘매도’ 의견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형 헤지펀드의 롱숏전략이 박스권 장세의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공모형 롱숏펀드도 잇따라 출시됐다. 투자 여력이 크지 않은 개인투자자들은 사모 형태의 헤지펀드가 아닌 헤지펀드와 비슷한 전략을 구사하는 공모 형태의 롱숏펀드에 투자할 수 있는데, 작년 한해 공모형 롱숏펀드에는 1조4000억원 가까운 자금이 들어왔다.

◆ 1500억원에서 2조원 규모로 성장

한국형 헤지펀드 성장 추이

지난 3월 신규 설정된 브레인자산운용의 3호 헤지펀드 ‘한라’는 내놓은 지 하루 만에 투자자 한도인 49명을 모두 채웠다. 투자자 49명 모두 개인투자자로 이 펀드가 모은 자금은 1160억원으로 한 사람당 평균 투자액은 20억원이 넘는다.

국내 헤지펀드는 최소가입금액이 5억원 이상, 재간접 헤지펀드의 경우도 1억원으로 제한돼 개인투자자들의 접근이 쉽지 않지만 이 같은 상식을 깬 것이다.

지난 2011년 12월 운용사 9개, 펀드 12개, 총 설정액 1490억원으로 출범한 한국형 헤지펀드는 3월 기준으로 운용사 12개, 펀드 26개, 총 설정액 2조6655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1년에 6000억~7000억원의 자금이 한국형 헤지펀드로 들어오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2015년 말에는 설정액이 3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기대된다. 자금 유입에 가속도가 붙는다면 5조원도 가능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자본시장연구원은 이 같은 성장세가 지속될 경우 2020년에는 설정액이 9조~13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운용 성과(트랙 레코드)가 쌓이는 오는 2015년에는 한국형 헤지펀드가 재도약하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주식시장의 큰손인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참여하려면 최소 3년 이상의 트랙 레코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행정공제회와 교원공제회가 각각 1000억원 미만의 자금을 헤지펀드에 투자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트랙 레코드 부족 등을 이유로 투자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지만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 박스권 증시에서 선전

코스피지수는 지난 3년 동안 1700~2100선을 오가는 박스권을 맴돌았다. 국내 증시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성장주의 부진이 이어졌고 국내 주식형 펀드의 성과마저 저조했다. 2000년대 중반 높은 수익률로 자금을 끌어들이던 주식형 펀드에서 자금이 본격적으로 이탈했다.

한국형 헤지펀드 역시 설정 첫해인 2012년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한 펀드가 절반을 넘었다. 하지만 설정된지 2년이 지난 후에는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한 펀드가 전체의 30% 수준으로 줄었다.

초기 시행착오를 겪으며 몇몇 한국형 헤지펀드는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반면 수익률이 우수한 펀드는 2호 펀드를 출시하는 등 반응이 뜨거웠다.

2011년 설정된 삼성자산운용의 헤지펀드는 꾸준히 코스피지수 상승률을 넘는 수익률을 내고 있고, 2012년과 2013년 한국형 헤지펀드 시장에 진입한 브레인자산운용과 트러스톤자산운용의 헤지펀드도 우수한 성과를 내고 있다.

투자자들의 투자성향 변화도 한국형 헤지펀드가 인기를 끌게 된 원인 중 하나다. 고위험·고수익보다 중위험·중수익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헤지펀드는 기본적으로 위험을 회피하거나 분산시키기 위한 상품으로 등락이 큰 수익률보다 안정적이고 꾸준한 수익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김종민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형 헤지펀드가 초기 시행착오 단계를 지나 수익률 기준으로 재편되고 있다”며 “기관 자금이 더 많이 유입되면 헤지펀드 시장이 전망보다 더 크게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