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 직원마저 인사 청탁을 해 옵니다. 이게 정상적인 조직에서 가능한 일입니까."

KB금융이 지난 18일 경기도 일산 KB국민은행 연수원에서 가진 '반성 속의 새 출발, 위기 극복 대토론회'에선 KB금융 조직원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얘기가 적나라하게 쏟아졌다. 이 자리엔 임영록 회장과 이건호 국민은행장 등 계열사 CEO, 그리고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KB금융지주의 임직원 61명이 참석했다. 토론회는 18일 오후 5시에 시작돼 다음 날 0시 40분까지 진행됐다. 인사 정책, 단기 성과주의 극복, 내부 통제 등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된 이번 토론회에선 통렬한 자성(自省)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인사 불신이 줄 대기 촉진"

회의에선 외부인이 하는 것 이상으로 강도 높은 내부 비판이 쏟아졌다. 정민규 KB금융 준법감시인은 "여러 사고를 보면 대형 시중은행에서 발생한 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내부 통제 시스템이 허술했다"며 "윤리 의식이 결여된 직원들을 그대로 방치할 정도로 총체적 부실이 있었다"고 반성했다.

지난 18일 경기도 일산 KB국민은행 연수원에서 열린 ‘위기 극복 대토론회’에서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이 고객 신뢰 회복을 위한 결의문에 서명하고 있다(왼쪽 사진). 8시간 가까이 진행된 이날 토론회에서는 인사 시스템 등에 대한 다양한 내부 비판이 쏟아졌다. 한 여직원이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고 있다.

사고의 주된 원인으론 원칙 없는 인사 시스템이 지목됐다. 김상환 KB금융 인사 담당 상무는 "학연, 지연, 파벌 등을 이용한 줄 대기 문화가 형성되면서 끈이 없으면 주요 보직에 갈 수 없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며 "인사에 대한 불신이 줄 대기를 촉진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동철 KB금융 과장은 "저런 사람은 안 돼야 한다는 사람이 승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가 직원들 사기를 가장 많이 떨어뜨린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김 상무는 "가만히 있으면 불이익을 본다는 피해 의식이 생기면서 내부뿐 아니라 외부로 인사 청탁하는 사례마저 나온다"며 "내부에서 앞길이 보이지 않으면 외부 세력을 통해 역전을 노린다"고 말했다.

2001년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이 합병된 후 10년 넘게 시간이 흘렀는데 두 출신 간 화합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 참석자는 "출신이 다양한 직원이 근무하면서 복잡한 이해관계가 형성됐다"며 "파벌 조성, 인사 나눠먹기, 편파 인사 같은 폐해가 생기면서 성과주의 인사 원칙이 훼손됐다"고 말했다. 다른 참석자는 "조직의 발전보다 인적 네트워크와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문화가 팽배하다"고 지적했다.

"직원들 하향 평준화됐다"

몇 년 사이에 크게 추락한 영업력도 비판 대상이 됐다. 이희권 KB자산운용 사장은 "모두가 인사에만 신경 쓰면서 직원들의 업무 지식이 하향 평준화돼버렸다"며 "직원들이 승진에 유리한 자리만 선호해 승진이 어려운 PB(프라이빗뱅킹)센터 등은 외면하면서 특수 분야의 경쟁력이 떨어졌다"고 지적했다.

단기 성과주의와 잘못된 보상 체계도 문제로 거론됐다. 윤웅원 KB금융 부사장은 "적극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대우를 받기보다 업무 리스크만 떠안는 구조"라며 "승진에서 소외되면 부지점장으로 정년까지 일하는 게 '위너(winner·승자)'란 말까지 나오는 등 조직 내에 무임승차자가 가득하다"고 비판했다.

박인병 KB부동산신탁 사장은 "직원들이 KPI(업무성과지표)에 매몰돼 있다"며 "정기예금(금리 연 3% 이상) 점수를 채우기 위해 20억원의 요구불예금(금리 연 0.1%) 유치를 정기예금으로 돌리는 사례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혁신하면 신한은행 이길 수 있다"

인사 난맥상 해결을 위해 이건호 국민은행장은 "인사 시스템 쇄신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가동하고 있다"며 "인사 사고가 다시 발생하면 관리자에게 확실한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영업력 회복을 위한 대안으론 보상 체계 개편이 제시됐다. 연공에 따라 자연스레 보수가 증가하는 보상 체계를 고쳐 목표를 초과 달성하면 보상이 주어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헌 국민은행 부행장은 "1인 점포장(직원 없이 혼자 영업 활동을 하는 지점장급 고참 직원)을 확대해 무임승차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 직원을 대표한 손지연 대리는 "항상 비교당하는 신한은행과 견줘보면 KB금융의 젊은 직원들이 못할 게 전혀 없다"며 "우리가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일해 리딩뱅크 자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경영진이 노력해 달라"고 요청했다.

임영록 회장은 토론의 시작과 끝에 모두·정리 발언만 했을 뿐 각종 얘기를 메모하면서 경청했다. 임 회장은 "지금이 아니면 문제를 고칠 수 없다"며 "KB가 정말 변했다는 얘기를 듣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