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률 교수, 정영기 교수

국내 연구진이 미국에 이어 둘째로 인체의 복제 배아(胚芽)줄기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황우석 박사의 논문 조작 사건 이후 선두를 빼앗긴 세계 줄기세포 연구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다시 주도권을 가져올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배아줄기세포는 인체의 각 부분으로 자라나기 전의 원시(原始)세포로, 파킨슨병·실명(失明) 등 난치병 환자 치료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세계 줄기세포 시장은 2012년 11억달러(약 1조1400억원)에서 2020년에는 160억달러(약 16조6200억원)로 급성장할 것이라고 정부는 전망하고 있다.

줄기세포로 환자 맞춤형 치료 길 열었다

차병원 줄기세포연구소 이동률 교수와 미국 차병원 줄기세포연구소 정영기 교수 연구진은 저명한 국제학술지 '셀 스템 셀(Cell Stem Cell)' 인터넷판 18일자에 "성인 남성의 피부 세포를 추출해 핵이 제거된 난자와 융합, 복제 배아줄기세포를 얻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실명 환자가 자신의 세포로 배아줄기세포를 만들어 건강한 눈 세포로 길러낸 뒤 병에 걸린 눈 부분을 대체할 수 있다. 자신의 세포로 환자 개개인에 필요한 맞춤형 세포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인체의 거부반응을 줄일 수 있는 것이 줄기세포 치료의 최대 장점이다. 다른 사람의 세포나 장기를 이식하면 부작용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앞서 작년 5월 미 오리건대 미탈리포프 교수팀은 세계 최초로 인간의 복제 배아줄기세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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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탈리포프 교수팀은 태아와 신생아의 피부 세포를 이용했다. 태아나 신생아 세포는 아직 덜 자란 상태여서 복제가 쉽지만 노화가 진행된 성인 세포는 복제하기 어렵다. 난치병 환자 대부분이 성인인 점을 감안하면 차병원 팀의 연구는 환자 맞춤형 치료제를 상용화하는 국제 경쟁에서 한발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에 차병원 팀은 여성 4명에게서 기증받은 난자 77개를 성인 남성 2명의 피부 세포와 융합시켜 최종적으로 2개의 복제 배아줄기세포를 성공했다.

2년 내 임상시험… 16조원 시장 노린다

이번 성과로 우리나라가 복제 배아줄기세포 치료제를 빨리 개발해낼 가능성이 커졌다. 이번 논문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차병원 연구팀은 실제 환자의 세포로 건강한 복제 배아줄기세포를 만드는 실험을 상당 부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동률 교수는 "독성검사 등을 거치는 데 1~2년쯤 걸릴 것"이라며 "이르면 2년 내에 환자 맞춤형 복제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제로 임상시험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줄기세포 치료는 원칙적으로 뇌·심장·척추 등 모든 인체 부분에 적용할 수 있다. 차병원 연구팀은 이 가운데 파킨슨병과 실명 분야 치료기술을 먼저 개발 중이다. 뇌세포가 손상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되는 파킨슨병은 치매에 이어 둘째로 흔한 퇴행성 뇌질환이다. 국내 환자도 10만명이나 된다. 정영기 교수는 "이미 줄기세포로 파킨슨병 치료물질(도파민) 분비세포를 만드는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국의 허가만 받으면 임상시험을 그만큼 빨리 진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줄기세포 세계시장은 미·일이 주도

과학계는 "이번 성과가 국내 줄기세포 산업을 다시 활성화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재 줄기세포 연구에서 가장 앞서가는 국가는 미국과 일본이다. 미국은 줄기세포 연구에 연간 15억달러가 넘는 돈을 투자하고 있다. 작년 1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정부 연구비를 줄기세포에 투자할 수 있도록 했다.

일본은 유도만능줄기세포(iPSc)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iPSc는 다 자란 세포에 특정 유전자를 넣어 배아줄기세포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교토대 연구팀은 이 연구로 2011년 노벨상을 받았다. 일본 정부는 10년 동안 매년 110억엔(약 1210억원)을 iPSc 연구에 집중 투자하기로 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작년 각종 줄기세포 연구에 1007억원을 투자했지만 줄기세포 복제 연구에 대한 투자는 ‘0’원이었다.

종교계 등에서는 “생명으로 자라야 할 수정란을 파괴하는 복제 연구를 반대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 때문에 국내법은 불임 치료에 쓰고 남은 냉동 난자나 미성숙 난자만 복제 연구에 쓸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차병원은 국내 연구가 어려워지자 난자 확보가 용이한 미국에서 이번 연구를 진행했다. 김동욱 연세대 의대 교수는 “복제 배아줄기세포는 다른 줄기세포와 달리 암 발생 우려가 없고, 다양한 세포로 자라나는 능력이 뛰어나다”며 “환자 맞춤형 치료제로 개발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말했다.

☞배아(胚芽)줄기세포

정자와 난자가 만난 지 5일쯤 된 배아(수정란)에서 만들어지는 일종의 원시(原始)세포로,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종류의 신체 조직으로 자라난다. 나무의 가운데 줄기에서 가지가 뻗어나가 잎과 열매가 달리는 것과 비슷해 줄기세포란 말이 붙었다. 불임 치료 후 남은 수정란을 이용하는 것은 ‘수정란 배아줄기세포’, 핵을 뺀 난자와 다 자란 세포를 융합해 만든 복제 배아에서 얻은 것은 ‘복제 배아줄기세포’라고 한다. 일본에서 주로 연구하는 유도만능줄기세포(iPSc)는 다 자란 세포에 특정 유전자를 집어넣어 배아줄기세포 상태로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