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이 너무 위험하다는 걸 알았지만, 피부로 와 닿지는 않았었습니다. 손님 돈으로 딜을 하니까 손실이 나도 손님과 협상을 잘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 때는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제가 풋옵션을 잘못 매도한 거죠. 2000원 짜리가 다음날에 50만원까지 250배가 치솟았습니다. 제가 장중 대응을 했어야 했는데, 손절을 못했습니다. 손실이 3~4억대였죠. 지금으로 치면 10억은 될 겁니다. 그때 제 나이가 스물여덟이었습니다. 연봉이 5000만원도 안됐었죠."

한양증권 최권식 부장


여의도 한양증권에서 만난 최권식 부장(37)은 "아마도 이 바닥에서는 다 한 번씩 죽다 살아난 고비를 겪었을 것"이라면서 "그런 일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껄껄 웃었다. 최 부장 자신도 어릴 때 옵션 대회에서 1위도 해보고 자신감이 넘쳤다가 된통 당했다는 것. 그러면서 그는 "옵션 시장에서 혼자 허파에 바람이 들면 절대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최 부장은 성균관대 경제학과 96학번 출신으로 2000년 군장교 입대 후 옵션을 처음 접했다. 당시 2001년 미국의 9.11 테러 사건으로 주가가 폭락, 풋옵션으로 500배가 넘는 수익을 거뒀다는 소문이 나면서 국내에서도 옵션 시장에 대한 관심이 꿈틀대던 때였다. 그는 "그때 군장교 가족들에게 알음알음 옵션 관련 강의를 해주면서 나도 겁 없이 옵션 시장에 뛰어들게 됐다"고 말했다.

무턱대고 뛰어든 옵션 시장은 만만치 않았다. 그는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받은 사망보험금을 몽땅 투자했다가 거의 다 날려버리기도 했다”면서 “빚을 갚기 위해 증권사에 입사원서를 내게 됐다”고 털어놨다. 그는 2002년 군 제대 후 교보증권에 입사했다. 지점에서 투자자들의 위탁 계좌로 선물ㆍ옵션 계좌를 운용했다. 그러다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사고’를 친 것이다.

"하필 제가 근무했던 지점이 옵션에 특화됐던 지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쓰나미'가 왔죠. 반 이상의 직원이 옷을 벗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본사를 지원해보고 싶었는데, 지점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죠. 지금 생각하면 제가 옵션에 대해 요만큼만 알고 설쳤던 겁니다."

이후 그는 투자자들이 위탁한 돈을 메우기 위해 투자자들을 일일이 설득했다. 그는 "지금은 날 고소하더라도 나는 줄 돈도 없고 무조건 기다려 달라고 했다"면서 "그러고 무조건 열심히 매매해서 겨우 1년 반 만에 돈을 갚게 됐다"고 털어놨다.

한양증권 최권식 부장


이후 2008년 그는 본격적으로 딜링업무에 도전했다. 최 부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제일 잘난 줄 알았는데, 딜링룸에 오니 정말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많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즈음해서 리먼 사태가 터졌고 그는 다시 법인 선물옵션부서로 옮겼다. 운용사들의 주문을 증권사가 위탁해 대신해주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이번엔 '사건'을 저질렀다.

"2009년 12월쯤이었습니다. J사가 S사의 주거래고객이었는데, J사에서 제게 1조원짜리 주문을 내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날은 누가 봐도 매도우위 시장이었죠. 모두가 하락을 예상하는데 저는 그냥 매수 1조를 질렀습니다. 그야말로 동시호가가 뒤집어 진 거죠. 그때 저 때문에 칼 맞고 잘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갑자기 저란 사람도 시장에 소문이 쫙 나게 됐죠."

그는 선물ㆍ옵션 시장에서 승자가 있으면 반드시 패자가 있기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누군가가 이득을 얻으면 누군가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 최 부장은 "그때 저는 회사에서는 평가가 좋아졌지만, 업계에서는 소문이 크게 안 좋아졌다"고 토로했다.

이후 그는 교보증권에 사표를 내고 2010년 다른 증권사로 이직했다. 아무래도 딜링 업무를 다시 하고픈 마음이 컸다고 한다. 한 증권사 상품운용팀에서 딜링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장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2010년 11월 11일, 도이치 쇼크때였죠. 그때도 엄청 좌절했습니다. 옆방에서 딜러 한명이 70억원을 까먹은 거죠. 그 증권사가 딜링부서를 철수해버렸습니다. 그때 딜러가 한 30명 정도 있었는데, 그야말로 와르르 나갈 수밖에 없었죠."

한양증권 최권식 부장


그러다 2012년 최 부장은 다시 한양증권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나를 뽑아준 상무한테 나를 왜 뽑아준 거냐고 물어보니 그가 '너는 뭔가 목마름이 느껴졌다'고 하더라"라고 웃었다. 그는 "그때를 기점으로 다시 열심히 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새벽 4시쯤에 일어나 6시에 출근, 오후 3시 장 마감까지 화장실도 뛰어갔다오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업계에는 아예 성인용 기저귀를 차는 사람도 있다고 귀띔했다. 술은 옵션 만기가 끝나는 날에만 먹는다.

"옵션은 일단 콜 위주로 매매합니다. 풋을 안 하는 이유는 9.11 테러 때 때문이죠. 풋은 잘못 만지면 독이 돼서 파산을 시킬 수 있습니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는 거죠. 우리는 아무리 좋은 비율이 나와도 풋옵션은 잘 건드리지 않습니다. 합성전략을 쓸 때도 풋은 거의 안하죠. 수익이 크진 않더라도 큰 손실도 없습니다."

그는 회사에서도 쉽게 말해 '옵션의 채권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옵션으로 높지는 않아도 꾸준히 수익을 내는 게 목표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추정 가능한 범위 내에서 예측 가능한 수익률을 내도록 노력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예상치 못한 상황은 늘 찾아온다. 장이 결국 '큰손' 외국인에 의해 흘러가기 때문이다.

"원래 생각해둔 손절매 일정 비율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격이 크게 틀어질 때가 있죠. 어떤 사람이 행사가를 만들기 위한 건지, 인위적으로 뭘 하는 건지. 그땐 속는 셈치고 다시 물량을 던져줍니다. 그래도 가격이 계속 크게 틀어졌을 때가 바로 9.11 테러 사태 때죠. 그럴 땐 고민을 해야 합니다. 물론 머리가 아니라 손이 먼저 가야 합니다. 생각하는 순간 가격이 이미 뜨고 있기 때문이죠. 대개 콜은 틀어지는 비율이 약간 공식화돼 있습니다. 풋은 거의 맘대로죠. 이걸 움직이는 이는 결국 돈이 많은 외국인 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냥 피해 줄 수밖에 없죠."

그는 결국 트레이더도 ‘정신 수양’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하고 소신껏 매매를 하더라도 결국 리스크 통제를 위한 건전한 마인드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마추어는 '뭐 때문에'라고 말하지만, 프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으로 대합니다. 아무리 리스크가 커도 도 닦는 분위기로 가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요가나 참선, 이런 걸 하는 트레이더들도 많습니다. 결국 스킬은 한장 차이죠. 리스크를 되도록 피하는 사람이 리스크를 가져가는 사람보다 롱런하고 수익률은 적어도 더 안정적으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최 부장은 최근 정부의 파생상품 규제 강화 움직임에 대해서는 소신 있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사실 파생상품시장이 어려워진 게 꼭 옵션 승수제 때문은 아니라고 본다"면서 "거래량은 줄었지만, 거래대금은 꼭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체적으로 우리가 옵션 승수 인상 직전 1년과 직후 1년을 조사해보니 거래량은 5분의 1로 줄었는데, 거래대금은 크게 줄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파생시장이 위축되기 시작했는데, 이를 정부가 파생 신상품을 늘리고 주식 거래시간을 연장하는 등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전반적인 파생상품 시장의 규제를 느슨하게 풀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주장했다. 또 불법 대여계좌의 병폐 문제도 해결할 부분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