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연구원이 이주열 한국은행 신임 총재의 취임을 이틀 앞둔 30일 '지난 20년간의 통화정책 역사가 한은에 주는 시사점' 보고서에서 잘못된 통화정책이 우리 경제를 위험에 빠뜨린 3가지 사례를 제시했다.

물가안정에만 치중하느라 경상수지 적자, 국제통화기금(IMF)의 과도한 긴축 요구, 부동산 버블, 가계대출 버블 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으로 ▲1994~1995년 반도체 호황과 1997년말 외환위기 ▲1998년 IMF의 고금리·고환율 정책으로 고통받던 시기 ▲2001년 이후 과도한 장기간의 저금리 시기 등을 지적했다.

박종규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은이 물가안정에 몰두하느라 경제 내부에서 자라고 있는 위험요인을 놓치거나 적기에 대응하지 못한다면 경제전체가 커다란 위험에 빠지고, 그러면 물가안정이란 목표는 의미가 반감된다"며 "소비자물가를 넘어 시야를 넓혀서 단기적 경기변동만이 아니라 몇 년 뒤의 상황까지도 내다보고 잠재적 경제위험 요인에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94~95년 반도체 호황, 경기과열 때 긴축 못해 1997년 외환위기 맞아

1994년과 1995년 반도체 호황기에 설비투자가 전년대비 20% 이상씩 증가하고 실질 경제성장률은 각각 8.5%, 9.2%에 달했다. 경기과열 방지를 원했던 정부와 긴축을 원치 않던 재벌 대기업들 사이에 뜨거운 '경기과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종규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1997년 3월 발간된 시뮬레이션 연구에 따르면 1994~1996년 한은이 통화 증가율을 2%포인트만 낮게 가져갔더라면 3년동안 약 82억달러의 경상수지 개선이 가능했고 1994~1997년 4년동안 100억달러 이상의 경상수지 개선 또는 외환보유액 증가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1994~1995년에 통화증가율은 4%포인트 정도 낮게 했더라면 1994~1997년 누적 경상수지 적자 개선 폭은 200억달러 이상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1997년말 외환위기 때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이 38억달러에 불과했고 이후 IMF로부터 195억달러를 빌렸다가 조기상환했음을 감안하면 반도체 호황 당시 한은이 경기과열을 과감하게 진정시켰더라면 우리경제는 외환위기를 겪지 않았거나 훨씬 완화된 형태로 겪었을 것이라고 박 연구위원은 지적했다.

◆ 98년 IMF의 고금리ㆍ고환율 정책 폐해에도 고금리 정책 수정 요구 못해

한은이 1998년 IMF에 콜금리 인하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던 것도 문제 사례로 꼽혔다. 외환위기 당시 IMF는 우리나라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본원통화량, 외환보유액, 콜금리에 대한 3가지 목표치를 일별기준으로 제시했다. 이 중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즉시 구제금융을 중단하겠다는 엄포였다.

우리나라는 콜금리를 IMF가 요구했던 높은 수준을 정확히 준수했다. 그런데 콜금리가 너무 높다보니 본원통화량과 외환보유액 목표치를 훨씬 초과 달성하게 됐다. 본원통화량 한도액 목표는 1998년 1~4분기에 각각 25조9000억원, 23조3000억원, 23조6000억원, 24조1000억원이었는데 실적치는 각각 20조7000억원, 18조7000억원, 18조7000억원, 20조2000억원에 불과했다. 통화긴축이 과도했던 것이다.

박 연구위원은 "1998년처럼 경기위축과 금융경색이 극심했던 상황에서 통화량을 그처럼 억제해 고금리를 유지하는 바람에 최악의 경기침체를 초래했다"며 "경제가 과도하게 위축되다보니 수입이 급감해 경상수지 흑자는 사상 최대로 급증했고 외환보유액이 목표를 훨씬 초과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한은이 적극적으로 콜금리 인하에 나섰던 것은 1998년말 김대중 대통령의 "외환위기는 극복됐다"는 선언과 함께였다. 그때는 이미 수많은 기업들이 흑자도산했고 실업자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온 뒤였다.

◆ 2001년 이후 장기간 저금리 유지해 부동산 버블, 가계대출 버블 조장

세번째 사례는 2001년에 시작된 저금리를 조속히 정상화하지 않았던 것이다. 2000년말 세계적으로 IT(정보기술) 버블이 붕괴되고, 2001년 9.11테러로 세계경제가 위축되자 한은은 콜금리를 사상 최저수준으로 연달아 낮추면서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 그 결과 2001년 경제성장률은 중국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3.0%를 기록했다. 문제는 위기 대응이 성공한 뒤에도 금리를 정상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02년 민간소비 증가율이 경제성장률을 앞지를 정도로 소비가 과열됐지만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001년의 4.1%보다 오히려 낮아진 2.8%에 그쳤다. 세계적 디플레이션과 중국의 값싼 상품 수출이 늘어난 덕분이었는데 이후 2002~2007년에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평균 2.9%에 불과했다. 한은이 금리를 너무 오랫동안 계속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바람에 부동산 버블과 가계대출 버블이 발생했다.

부동산 버블 발생 및 확장의 근본원인이 저금리라는 주장은 2002년 가을에 나왔지만 한은은 '통화정책이 부동산 버블과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한은이 입장을 바꿔 저금리가 부동산 가격 급등의 원인 중 하나였음을 처음 시인한 것은 버블 발생 4년째인 2005년 가을이었다. 이후에도 한은은 이렇다 할 금리조정을 하지 않고 부동산 버블은 확장을 거듭했다. 부동산 버블이 겨우 확장을 멈춘 것은 금융감독당국이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강력히 도입했는 2007년초였다.

2002년부터 은행권의 가계대출이 전년대비 50%씩 폭증하면서 가계대출 버블도 생겨났다. 지나치게 많은 가계부채가 정상적인 소비를 어렵게 해 민간소비가 부진하고, 내수가 회복되지 않으며, 고용이 증가하지 못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가계부채 급증은 지금까지도 우리 경제의 역동성을 가로막고 있는 원인 중 하나다. 가계부채 때문에 가계저축률도 외환위기 이전 15~20%대에서 2002년 세계 최저수준인 0.4%로 급락했고 지난해에도 2%대에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