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딸아이 가방 속에 막대사탕이 들어 있었어요. 어디서 난 거냐고 물으니 배가 고파서 몰래 집어왔대요. 제가 그동안 아이를 방치했구나 하는 미안한 마음에…."

모처럼 정장을 차려입고 면접관 앞에 앉은 엄마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한 시중 은행에서 앞만 보고 달리던 지난 2012년, 과장 승진을 앞두고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가정을 택해야 했던 상황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잠시 숨을 고른 여성은 "하지만 막상 직장을 그만두고 보니 모든 에너지를 남편과 아이에게 쏟는 바람에 잔소리만 많아지더라"며 "엄마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이에게 최선의 교육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1일 낮 서울 신한은행 본사 회의실. 검은색과 흰색 정장을 갖춰 입은 여성들이 면접관들 앞에 앉아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단정한 용모, 꼿꼿하게 세운 허리, 긴장되고 상기된 표정은 여느 신입사원 면접장 풍경과 비슷했지만, 얼굴에서 약간의 '연륜'이 느껴진다는 점이 달랐다. 육아와 가사 때문에 직장인의 꿈을 접어야 했던 이른바 '경력단절 여성'들이 재기의 꿈을 안고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신한은행이 새로 뽑는 시간선택제 일자리 최종 면접 현장이다.

낮 12시부터 4시 반까지만 은행 각 지점 창구에서 근무하는 데다 정규직으로 정년이 보장되는 파격적인 조건이라 채용 열기가 뜨거웠다. 은행 입장에서는 고객이 몰리는 오후 시간대에 창구 인력을 보강해 고객 서비스 질을 높일 수 있고, 지원자들 입장에서는 아이가 유치원이나 학교에 가 있는 시간을 활용해 사회 활동을 이어갈 수 있어 양쪽의 이해가 딱 맞아떨어졌다. 이 때문에 200명 모집에 2만명이 몰려 경쟁률이 100대 1에 달했다. 전체 지원자 중 70%가 대졸자고, 80%는 금융권 근무 경력자였다. 육아와 직장을 병행할 수 있다는 말에 새 출발을 꿈꾸는 아기 엄마, 자녀를 대학까지 보내고 20여년 만에 취업 전선에 뛰어든 50대 여성, 신한은행 채용시험에 세 번 낙방한 뒤 주부로 살다가 재도전한 여성…. 나이와 경력,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다시 일하고 싶다는 의지는 한결같았다.

출산과 육아 등의 이유로 직장을 포기했던 ‘경력단절’ 여성들이 지난 21일 오후 서울 신한은행 본점 회의실에서 열린 시간선택제 일자리 최종면접장에 참석해 면접관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0명을 뽑는 채용모집에 2만여명이 몰려 경쟁률 100대 1을 기록했다.

신한은행에서 과장으로 일하다 퇴사한 30대 여성 A씨도 긴장된 표정으로 면접장에 들어섰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아이 돌봐줄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사표를 쓴 것이 3년 전. A씨는 "어젯밤 신한은행에서 근무하는 꿈을 꿨다. 전산 사용법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며 "합격하면 신입사원의 마음으로 열심히 금융상품을 팔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금융사 근무 경력이 있는 40대 여성 B씨는 은행에 다니는 남편의 권유로 15년 만에 재취업에 나섰다. "남편 월급이면 생계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B씨는 "중학교 2학년이 된 아들이 '엄마는 집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싫었다"며 "서류 전형에 합격했다고 하니 벌써 아들이 보는 눈길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응시자들의 취업 열기와 스펙에 면접관들의 고민도 깊어졌다. 신한은행 김인기 인사부장은 "다들 경력이 매우 좋아 누굴 뽑고 누굴 떨어뜨려야 할지 난감하다"며 "당장 현장에 투입해도 근무가 가능한 수준의 지원자들이 넘쳤다"고 했다. 이날로 모든 전형을 마친 신한은행은 28일 합격자를 발표한 뒤 다음 달 7일부터 9주간의 교육을 거쳐 6월 5일 현장에 배치한다. 이 은행은 내년과 내후년에도 총 300명의 시간선택제 정규직 직원을 더 채용할 예정이다.

40분간의 면접을 마치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면접장을 나선 지원자 C씨는 "육아 때문에 일을 관둔 나랑 비슷한 처지의 엄마들이 이렇게 많다는 걸 새삼 느꼈다"며 "애초에 육아 때문에 경력을 포기하는 여성이 없도록 직장 내 어린이집이나 탄력 근무제 등 워킹맘을 위한 제도와 시설이 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근 은행권에선 경력단절 여성 채용이 붐을 이루고 있다. 기업은행이 지난해 은행권에서 처음으로 109명을 시간제 정규직으로 채용해 창구 직원, 전화상담 요원 등으로 배치했다. 우리은행도 지난 10일부터 영업점 창구 직원으로 경력단절 여성 200명 정도를 채용하는 절차를 진행 중이다.

일반 기업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CJ는 매장관리 등 지원업무뿐 아니라 디자인, 마케팅 등 전문 직군까지 개방하는 '리턴십' 제도를 도입, 지난해 118명을 뽑은 데 이어 올해도 136명을 채용할 계획이다. 또 SK텔레콤은 지난해 350명을 채용해 콜센터 등에 투입했다. 정부도 경력단절 여성 등을 대상으로 2017년까지 총 1만7000명을 뽑아, 시간 선택제 인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