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내세균

더러운 존재로 치부되던 똥이 약도 듣지 않는 난치병을 치료하는 고마운 존재로 떠올랐다. 건강한 사람의 장내(腸內)세균을 환자에게 이식해 질병을 치료하는 이른바 '대변 미생물 이식(faecal microbiota transplantation·FMT)' 시술이 최근 5년 새 크게 증가한 것. 이에 따라 대변 미생물 이식이 새로운 형태의 약인지, 아니면 수혈(輸血)과 같은 조직 이식인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과연 똥은 약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식용 조직일까.

만병통치약으로 떠오른 장내세균

매사추세츠공과대(MIT)의 에릭 앨름(Alm) 교수는 지난달 20일 '네이처'지에 "미 식품의약국(FDA)이 대변 미생물 이식을 약으로 규정한 것에 반대하며 수혈과 같은 조직 이식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논문을 발표했다.

대변 미생물 이식이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은 최근 장내세균이 질병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잇따라 발표되면서 시술이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사이언스'지는 우리 몸에 있는 장내세균 100조 개가 암이나 당뇨, 비만과도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잇따라 밝혀진 것을 '2013년 10대 과학 뉴스'의 하나로 꼽았다. 장내세균 이식만으로 위 수술의 20%에 해당하는 체중 감량이 가능하다는 동물실험 결과도 나왔다. 심지어 자폐증도 장내세균의 균형이 무너져 일어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렇다면 건강한 사람의 대변에서 장내세균을 추출해 환자에게 이식하는 방법으로 살도 빼고 병도 치료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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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의학 학술지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NEJM)'에는 클로스트리듐 디피실균(菌)에 의한 치명적 설사병을 대변 미생물 이식으로 치료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장내세균의 치료 효과를 입증한 첫 임상 시험 결과였다. 연구진은 한쪽 환자들은 기존 항생제 치료를 하고, 다른 쪽은 항생제와 대변 미생물 이식을 병행했다. 항생제만 쓴 경우 13명 중 4명만 치료됐지만, 대변 미생물 이식까지 했을 때는 16명 중 15명이 치료되는 놀라운 결과를 보였다.

지나친 규제로 미허가 시술 늘어

과학자들은 다른 질병에도 대변 미생물 이식이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당장 환자에게 시술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해 미 FDA는 임상 시험 결과가 나온 클로스트리듐균 감염증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술에 대해 임상 시험 허가를 받도록 했다. 캐나다도 같은 방침이다. 앨름 교수는 "의료진이 임상 시험 신청서를 쓰느라 시간을 허비하면 환자가 제때 혜택을 받기 어렵다"며 "특히 환자들이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가정에서 직접 시술하는 예가 늘어나는 부작용도 생겼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인터넷에는 가정에서 할 수 있는 대변 미생물 이식을 소개하는 글과 동영상이 넘쳐난다. 환자들은 가족이나 친척의 대변에서 추출한 용액을 관장 도구로 대장에 주입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무분별한 자가 이식은 되레 더 큰 병을 부를 수 있다"고 우려한다. 대변 기증자의 건강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과거 수혈을 받다가 에이즈에 걸린 것처럼 다른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 또 주입 과정에서 대장에 상처가 나 출혈을 일으킬 수도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바이오의약품정책과 신경승 사무관은 "우리나라에선 아직 대변 미생물 이식 기술을 수입하겠다거나 개발하겠다는 등의 신청이 없었다"며 "어떻게 하는지 이해도 안 되고, 약물로 볼지 판단도 아직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반면 지금까지 별다른 규제를 하지 않았던 영국 정부는 최근 대변 미생물 이식 시술이 크게 늘자 규제안 검토에 들어갔다.

장내세균 담은 알약도 개발 중

과학계는 대변 미생물 이식을 혈액이나 골수, 연골 이식과 같은 조직 이식으로 규정하면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병원에 혈액은행처럼 대변 미생물 은행을 만들면 기증자의 건강 상태를 철저하게 검증할 수 있고, 환자도 싸고 빠르게 시술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환자에게 불편을 주는 시술을 간편한 알약 복용으로 바꾸려는 연구도 하고 있다. 캐나다 구엘프대의 에마 앨런-베르코(Allen-Vercoe) 교수는 건강한 사람의 장내세균을 실험실에서 배양해 캡슐에 담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 미국 케임브리지의 세레스 헬스(Seres Health)사와 보스턴의 베단타 바이오사이언시스(Vedanta Biosciences)사는 이미 같은 방법으로 만든 장내세균을 시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