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7월 16일 TV에서는 세계적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다. 미국 케네디우주센터에서 새턴V 로켓이 달 탐사선 아폴로 11호를 싣고 우주로 발사된 것이다. 아폴로 11호에 탄 우주인 암스트롱은 나흘 뒤인 20일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뎠다. 당시 연세대 조경철 교수와 은사인 서울대 위상규 교수가 위성중계 화면을 보며 해설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조 교수는 나중에 '아폴로 박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위 교수는 프로 골퍼 미셸 위의 조부이다.

당시 나는 서울대 항공공학과 신입생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폴로 11호의 달 탐사에 그리 열광적이지 않았다. 항공공학과 학생이었지만 원하던 전자공학과가 아니라 2지망으로 입학해 애착이 작았다. 결국 시위와 휴교령이 반복되는 가운데 전문 서적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어영부영 졸업반이 됐다.

김승조 항공우주연구원 원장이 우주발사체용 연료통 안에 들어가 있다. 김 원장은“과학 장교로 첫 국산 탄도미사일인 백곰 개발에 참여했던 경험이 항공우주공학자로 삶을 살게 한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1973년에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국방과학연구소(ADD)가 '과학 장교'라는 이름으로 연구원을 모집한 것이었다. 단기 장교 신분으로 연구 업무에 종사하면 병역의무도 해결된다니 귀가 활짝 열리는 소식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정부는 미군의 나이키 허큘리스에 맞먹는 국산 미사일을 개발하려고 연구원들을 모으고 있었다. 과학 장교도 그 차원에서 마련된 제도였다. 1974년 2월 초 나는 과학 장교 신분으로 지금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바로 옆에 있는 ADD에 배치됐다. 당시엔 ADD란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홍릉기계공업사'란 가명으로 불렀다.

홍릉기계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미사일 개발 프로젝트인지라 사무실도 좋았다. ADD 연구원이 받는 봉급은 당시 과학계 최고라는 KIST를 웃돌았다. 과학 장교들도 군에서 주는 봉급 외에 매달 특별 수당을 받았다. 신분 노출을 피하려고 장교인데 머리를 기를 수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장교 신분임에도 장발 단속에 걸려 경찰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마음껏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좋았다. 연구원의 주축이 나와 같은 20대였고 우리를 이끄는 박사들도 많아야 40대였다. 그야말로 한번 해보겠다는 열정으로 뭉친 젊은 조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나는 미사일 개발에 필수적인 초음속 시험을 맡았다. 미사일은 대부분 초음속 비행을 한다. 이 때문에 공중에 미사일 모형을 매달아 놓고 엄청난 세기로 바람을 일으켜 초음속 비행을 시험한다. 이 시험 시설을 바람이 나오는 동굴, 즉 풍동(風洞) 시설이라고 한다. 1975년 후반에는 ADD가 이전할 예정이었던 대전의 부지로 내려가 새로운 풍동 시설 건설에 투입됐다. 한번은 풍동 건설 현장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일하고 있는데, 누군가 연구원들을 보고 줄을 서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불시에 현장 시찰을 온 것이었다. 그날 난생처음 대통령과 악수하고 "수고가 많다"는 격려도 받았다.

김승조 항공우주연구원장(가운데)이 미국 유학 시절인 1980년 텍사스주 휴스턴의 존슨우주센터에서 아폴로11호를 발사했던 새턴V로켓 실물을 둘러보고 있다.

ADD 생활은 과학 장교 복무 기간 4년을 끝내고도 1979년까지 2년 더 이어졌다. 미사일 개발 프로젝트는 1978년에 결실을 이뤘다. 1978년 9월 26일 충남 서해안 안흥시험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地對空) 미사일을 꼭 빼닮은 국산 미사일이 하늘로 치솟았다. 첫 국산 지대지(地對地) 미사일인 '백곰'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탄도미사일 개발국이 됐다.

미사일 개발 프로젝트가 끝나고 이듬해 유학길에 올랐다. 우리 나이로 서른에 가는 늦깎이 유학이라 두려움도 많았지만, 과학 장교 시절 마음껏 연구에 몰입했던 경험이 힘을 내게 했다.

유학을 간 지 5년 만에 석사·박사 학위를 따고, 운 좋게 모교 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나로호 발사가 두 번이나 실패하면서 어려운 처지에 빠진 항공우주연구원 원장이 됐다. 아폴로 발사를 남의 집 불구경하듯 바라봤던 내가 우리나라 우주로켓 개발을 이끄는 자리에 온 것이다. ADD에서 국산 미사일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인연이 이 모든 것의 근거였다.


[우주에 도전하는 김승조 원장은…]

김승조(金承祚·64)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원장은 대구에서 태어나 경복고와 서울대 항공공학과를 졸업했다. 1973년부터 1979년까지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국산 미사일 개발에 참여했다.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텍사스대에서 구조해석학을 전공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현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로 부임했다.

김 원장은 서울대에서 수직 회전날개 4개로 비행하는 새로운 비행체인 사이클로콥터를 개발했다. 다목적 실용위성(아리랑) 3호와 5호 개발 프로젝트도 기획했다. 2009년 국내 학자로는 처음으로 미국항공우주학회(AIAA) 석학회원이 됐다. 2011년 6월 한국항공우주연구원 9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김 원장은 늘 “한국형 우주발사체의 경쟁 상대는 미국 민간 기업 스페이스X의 로켓”이라고 하면서 우주개발의 시장성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