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중독자 상당수가 우울증, 게임중독, 알코올 중독 등 다양한 정신질환을 동반한다. 심하면 자살, 횡령, 절도 등 범죄까지 저지르기도 한다. 정신과 전문의는 자기 처지에 맞는 치료법을 찾되 반드시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으라고 조언한다.

조선비즈는 지난 22일부터 이틀간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교수, 남궁기 세브란스병원 교수, 홍진표 서울아산병원 교수, 김대진 서울성모병원 교수 등 정신과 전문의 4명을 만나 국내 쇼핑중독 원인, 실태, 해결책에 대해 들어봤다.

전문의 4명은 “쇼핑중독을 예방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자신이 어떤 행동을 벌이고 있는지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노출을 차단하거나 약물 치료 등을 통해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윤대현 교수 “중독은 외로움의 증상”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개인 사업을 하는 40대 미혼 여성 김지현(가명)씨는 많은 모임을 하지만 항상 허전함을 느꼈다. 김씨는 이 허전함을 쇼핑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옷이나 구두 등을 사며 스스로를 꾸미는 것이 삶의 낙이었다. 처음에는 한 번 쇼핑하면 그 물건이 질리기 전까지 한 달 정도 행복했다. 그런데 점점 쇼핑 금액은 불어나고 만족을 느끼는 시간은 짧아졌다. 1000만원짜리 명품을 구매해도 한 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김씨의 사례는 외로움이 쇼핑중독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인간 유전자는 기본적으로 외로움을 느끼도록 만들어졌다.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했고 사회와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다.

현대사회는 외로움이라는 스트레스를 빠르고 강한 방법으로만 해소하려 해 중독이 발생한다. 인간의 뇌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두 가지 시스템을 이용한다. 쾌락 시스템과 항스트레스 시스템이다. 쾌락시스템은 빠르고 강하게 스트레스를 해소하지만 내성이 생긴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항스트레스 시스템은 느리지만 내성이 없고 건강하게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윤대현 교수는 “중독을 해결하기 위해선 항스트레스 시스템을 발달시키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쇼핑중독에 빠졌던 김씨의 경우 사업상 큰 모임 말고 위로받을 수 있는 사적인 모임을 하라고 조언했다”며 “주위 사람들과의 소소한 공감과 운동 등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도록 유도해 쇼핑중독 문제를 해결했다”고 밝혔다.

◆ 남궁기 교수 “누구나 이 정도는 한다는 건 착각”

남궁기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30대 여성 박수영(가명)씨는 홈쇼핑을 즐겨본다. 딱히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재미있어서 평소에도 틀어둔다. 그러다가 관심이 가는 물건을 하나둘씩 사기 시작했다. 구매 빈도와 금액이 늘어날수록 죄책감도 커졌다. 박씨는 남편에게도 필요한 물건을 사라고 권하며 죄책감을 씻어냈다. 사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남편도 사라고 꼬드겼고 지출은 두 배로 늘어났다. 하지만 박씨 부부는 ‘배우자보단 적게 내지 비슷하게 사니까’라며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남궁기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박씨 사례처럼 주변 사람을 기준으로 자신을 정상이라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중독 증상을 보이는 사람끼리 모여 남들도 이 정도는 한다고 착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예컨대 ‘쟤도 저만큼 사지 않나’하는 생각에 무차별한 쇼핑을 문제가 없다고 단정한다. 남궁 교수는 “우물안에 빨간 개구리만 있으면 그게 정상 같아 보인다”며 “쇼핑을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였을 뿐인데 남들도 다 이런 줄 착각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중독은 ‘공동의존’이라고 한다. 중독 증상을 보이는 사람끼리 모여 서로 동질감을 느끼고 서로가 서로의 중독 행위를 부추기기도 한다. 남궁 교수는 “공동의존이 되면 단독의존보다 치료가 더 힘들다”며 “병적인 중독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더 크다”고 주의했다.

남궁 교수는 “공동의존은 그 구성원 모두가 치료받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모두가 치료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적어도 주된 중독자가 치료를 받아야 중독 행위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 그는 “쇼핑중독으로 병원을 찾은 부부의 경우 부인 박씨가 주된 중독자였다”며 “부인을 보다 집중적으로 치료했다”고 밝혔다.

◆ 홍진표 교수 “내가 중독이라고 인지해야”

홍진표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30대 전문직 여성 남수정(가명)씨는 퇴근길에 백화점에 꼭 들린다. 딱히 사고 싶은 물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집에 가는 길에 위치한 백화점을 한 바퀴 돌며 윈도쇼핑 하는 것을 즐긴다. 그러다 가끔 기분전환을 위해 쇼핑을 한다. 예뻐 보이는 옷, 가방을 아무 생각 없이 샀는데 집에 오면 사온 물건에 흥미가 떨어진다. 매번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아니다. 생리가 다가오면 물건을 사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없다.

홍진표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여성의 쇼핑중독은 생리전 증후군(PMS)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생리전 증후군은 여성들이 월경이 시작되기 전에 불안감, 불면증 등을 겪는 증상이다. 이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쇼핑중독에 빠지기도 하고 심하면 도벽이 생기기도 한다.

생리전 증후군으로 쇼핑중독에 빠지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생리주기와 비슷하게 쇼핑행위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홍진표 교수는 “평소엔 백화점이나 홈쇼핑을 봐도 문제가 없었다면 자신의 생리주기를 파악해보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쇼핑 중독은 자신의 행위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큰 치료 효과를 보인다. 홍 교수는 “본인이 생리 주기 전에 충동 행위를 한다고 인지하면 스스로 조심하게 된다”며 “약물치료를 하지 않았는데 치료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심할 경우에는 약물 치료를 통해 중독현상을 완화시킬 수도 있다.

◆ 김대진 교수 “게임중독이 쇼핑중독으로 이어져”

김대진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중학생 강정호(가명)군은 인터넷 게임을 즐긴다. 게임을 하다 보니 아이템이 하나둘 필요했다. 남들보다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게임 캐릭터를 꾸미기 위해 조금씩 사기 시작했다. 수입이 없는 강씨는 매번 부모님의 카드로 게임 아이템을 구매했다. 처음엔 그 금액이 얼마 안 돼 부모님도 크게 제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점점 액수가 커지더니 아이템 구매에만 한 달에 250만원을 넘게 사용했다.

김대진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강씨의 사례처럼 게임중독도 쇼핑중독과 연관이 있다고 지적했다. 게임에 중독된 환자들은 게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아이템 구매에도 많은 돈을 쓴다. 구매 행위를 통해 쾌감을 느끼고 내성이 생겨 점점 더 많고 비싼 아이템을 산다. 쇼핑중독 증세와 동일하다.

문제는 게임 중독은 주로 수입이 없는 청소년들 사이에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쇼핑중독의 핵심은 ‘자신의 상황보다 과도한 비용을 지출했느냐’다.

김대진 교수는 “한 달에 10억 버는 사람이 5000만원 쇼핑하는 것은 중독이 아니지만, 한 달에 300만원 버는 사람이 1000만원 쇼핑하면 중독이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게임으로 인한 쇼핑중독은 일반적인 게임중독 치료와 같다”며 “게임중독과 함께 발생한 질병이 무엇인지에 따라 우울증이나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치료 등이 함께 진행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이템 살 돈을 달라며 부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까지 가면 입원치료도 한다”며 “2~3주 정도 입원해 물리적으로 노출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