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로 본사를 옮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삼성동 부지에 공개적으로 관심을 보여온 삼성그룹에 이어 국내 재계 1, 2위가 자존심 싸움을 벌이게 된 형국이다.

한전 본사가 있는 삼성동 부지는 축구장(약 7000㎡) 11배 넓이인 7만9342㎡(2만4000평) 규모에 달한다. 공시지가로는 1조4837억원, 시세로는 2조원대에 각각 이른다. 서울 강남에 남은 '마지막 금싸라기 땅'이다.

한국전력 고위 관계자는 26일 "현대차 측이 삼성동 본사 부지 매입 의사를 타진해왔다"며 "서울 양재동에 있는 본사를 이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전은 올 11월 전남 나주 혁신도시로 본사 이전을 마칠 계획이다. 늦어도 1년 뒤인 내년11월까지는 삼성동 부지를 팔아야 한다.

현재 한전 부지에는 지상 22층 높이 본관(대지 2889㎡)과 지상 4층 한빛홀(강당·3217㎡), 5층 규모 별관(3618㎡)이 자리 잡고 있다. 건물이 들어선 공간은 전체 부지의 12% 정도다.

뚝섬 무산된 현대차, 韓電 부지 '눈독'

현대차가 한전 부지 매입 방침을 내부적으로 굳힌 배경에는 최근 무산된 서울 뚝섬 110층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건설계획이 있다. 현대차는 2006년부터 서울 성수동 뚝섬 인근 옛 삼표레미콘 부지에 약 2조원을 투자해 초고층 빌딩을 짓고 그룹 전(全) 계열사를 입주시킨다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3만여명의 직원을 한곳에 모으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연구개발(R&D) 기능도 통합한다는 청사진이었다.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들처럼 자동차 테마파크 등도 짓기로 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강남구 삼성동 한전 본사 부지 인수를 타진하면서, 이미 관심을 나타내온 삼성그룹과 재계 1, 2위 간 치열한 자존심 싸움이 벌어지게 됐다. 점선으로 표시된 곳이 무역센터에서 바라본 한전 본사 부지로 면적은 축구장(약 7000㎡) 11배 넓이인 7만 9342㎡(2만4000평)다. 공시지가는 1조4837억원, 시세는 2조원을 훌쩍 넘는다.

하지만 지난해 서울시가 '초고층 건축 관리기준'을 내놓으면서 이 계획은 없던 일이 돼 버렸다. 서울시가 50층·200m 이상 빌딩을 지을 수 있는 지역으로 정한 도심·부도심 범위에서 삼표레미콘 부지가 최종적으로 빠진 탓이다. 8년 가까이 공을 들여온 뚝섬 프로젝트가 폐기되면서 대안(代案) 찾기에 나선 현대차가 한전 부지를 사실상 마지막 기회로 보고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현재 양재동 본사에서 수용 가능한 인원은 5000명 수준"이라며 "서울 역삼동에 본사가 있는 현대모비스는 물론, 현대·기아차 영업본부조차 양재동 사옥에 못 들어올 정도로 장소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현대·기아차 본사는 4기통 엔진을 형상화한 독일 BMW 본사, 73층 규모의 미국 GM 르네상스센터, 창업주 생가 등을 복원한 기념관이 있는 일본 도요타와 비교해 '회사의 철학을 알 수 없는, 단지 오피스 건물일 뿐'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런 수모를 씻고 '현대차만의 철학'을 반영한 건물과 박물관 등을 마련하기 위해 한전 부지가 최적격이라는 판단이다.

규모, 위치 등에서 最適

한전 부지는 부지 면적만 따지면 재계 라이벌들이 입주한 서울 서초구 삼성타운의 3배, 여의도 LG트윈타워의 6배 안팎이다. 호텔 등 대형 빌딩 4개가 들어선 여의도 IFC보다도 2배 이상 넓다. 현재 국내 최고(最高) 123층(555m) 높이 빌딩을 건설 중인 롯데월드타워 부지(8만7770㎡)와 비슷한 규모다. 롯데그룹은 내년에 완공되는 롯데월드타워 건설에 약 3조5000억원을 투자하고 있다.

서울 시내 미개발 부지 가운데 규모와 위치 등이 모두 압도적으로 뛰어나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서초동 롯데칠성 부지는 롯데가 자체적으로 호텔 등이 포함된 복합 시설로 추진 중이고, 동서울터미널·상봉터미널 등 부동산 업계에서 주목하는 각종 터미널 부지들은 시 외곽인 데다 2만~4만㎡ 규모에 불과한 게 단점이다. 한전 본사 부지는 인근에 파크하얏트·그랜드인터컨티넨탈 등 특급호텔이 다수 있는 데다 대형 컨벤션센터인 코엑스가 있는 점도 매력으로 꼽힌다. 또 도심에 적용되는 고도제한이나 유물 발굴 같은 돌발 변수도 없어 개발 과정에서 어려움도 적을 것으로 보인다.

금융 자본들도 가세할 태세

2009년 삼성물산포스코 컨소시엄이 삼성동 한전 부지 일대를 복합 상업시설로 개발하는 방안을 내놓았을 만큼, 부동산 업계에서는 이곳의 가치를 높게 보고 있다. 이미 삼성그룹은 삼성생명을 통해 2011년 인근 한국감정원(1만989㎡) 부지를 2328억원에 사는 등 매입 의사를 공개적으로 보여왔다. 지난해 5월 당시 변준연 한전 부사장은 "본사 인근 지하철 역명(驛名)과 발음이 같은 삼성그룹이 (삼성동 한전 부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 관계자는 "관심이 있는 것은 맞고, 상황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최근 말했다.

다만 삼성 측은 부지의 용도를 상업용지로 변경하는 과정에서 특혜 시비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전 부지의 95%는 3종 주거지역으로 현재로서는 세울 수 있는 건물 높이가 5~6층으로 제한된다.

현대차와 삼성그룹 외에 금융권 자금들도 인수전(戰)에 참여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국내에서 빌딩 투자를 활발히 해온 동남아 국부펀드 등 외국계 자금들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동산 및 투자업계 관계자는 "최근 채권 금리가 낮아지면서 중·장기로 자금을 굴려야 하는 보험업계 등의 돈이 투자처를 못 찾고 묶여 있는 상태"라며 "매각 방침이 결정되면 상당수 자금이 몰려들 것"이라고 말했다.

2조~3조원에 이르는 대규모 자금을 마련하려면 현대차 등 실(實)사용 기업들과 연·기금, 사모(私募)펀드 등 금융권이 컨소시엄을 이뤄 부지 매입에 나설 가능성도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