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달 사이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에서 ‘경제민주화’라는 단어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7월초 언론사 논설실장들과의 오찬에서 “(경제민주화 입법이)거의 끝에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한 뒤 박 대통령이 ‘경제민주화’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은 1~2회에 불과하다.

‘경제민주화’가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경제활성화’였다. 박 대통령은 최근 “경기회복의 불씨를 꺼트려서는 안된다”면서 투자활성화와 규제완화를 강조하고 있다. 대선 승리 1주년 무렵인 지난 17일 재계 맏형뻘인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찾아 “기업가 정신으로 투자하고 도전한다면 정부가 적극 뒷받침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경제민주화’ 깃발을 내리고 ‘비즈니스 프렌들리’로 돌아섰다는 해석이 나오는 대목이다. 박 대통령이 오는 19일로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된 지 꼭 1년을 맞는다.

◆ “경제민주화, 마무리됐다” 이후 멈춰진 경제민주화 입법

국회는 올해 상반기 모두 6개의 경제민주화법안을 통과시켰다. 대기업 임원 연봉 공개법,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확대하는 하도급법, 가맹점주 권리 강화법, 불공정특약을 금지하는 하도급법, 공정위 전속고발제 폐지법, 일감몰아주기 규제법 등이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이나 영세자영업자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을 규제하는 법안으로 분류된다.

전문가들은 일감몰아주기 규제법이 통과된 7월 정기국회 직후 “경제민주화 입법이 거의 끝난 것 같다”는 박 대통령의 발언에 주목하고 있다. 한 대선캠프 출신 인사는 “박 대통령은 대선 당시에도 대기업 지배구조 개혁보다는 대기업의 골목상권 진출 억제, 대·중소기업 간 공정한 거래질서 구축 등 불공정행위를 시정하는 것에 관심이 더 있었다”고 말했다. 애초부터 순환출자 금지 등 대기업 지배구조 개선 조치는 박 대통령의 우선 순위에서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기업 신규순환출지 금지법, 금융회사 대주주적격성 심사 강화법, 대기업 계열 금융회사의 의결권 제한 법 등은 현재 국회에서 법 개정 작업이 멈춰있다. 이번 정기국회에서 법안 처리를 위한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됐으나 여야 정치권의 정쟁으로 인한 국회 마비사태와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정부의 소극적인 입법 자세로 인해 내년 이후에야 대기업 지배구조 개혁 법안 심의가 이뤄질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대기업 지배구조 개혁과 관련된 입법 동력이 재점화될 지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신광식 연세대 교수는 “정책의 추진력 차원에서 시장에 주는 시그널이 중요한데, ‘경제민주화가 마무리됐다’는 정부 당국자들의 선언은 경제민주화 정책의 지속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줬다”면서 “경제민주화를 통한 구조개혁 의지가 퇴색됐다고 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 “경제활성화, 내용없는 빈 깡통···비전 보이지 않는 게 문제”

경제민주화에서 경제활성화로의 전환이 경제환경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는 국면에서 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것보다 규제 완화를 통해 기업의 투자를 이끌어내는 전략이 현실적이라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2%대 저성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내년에도 3%대 후반 성장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대내외 경제환경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러나 경제 전문가들은 창조경제 등 ‘박근혜표(表) 경제정책’의 비전이 모호하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경제활성화’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지만 구체적인 실행방안과 이를 추진하려는 리더십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한 국책 연구원 관계자는 “솔직히 박근혜 정부가 어떤 산업, 어떤 전략을 가지고 경제활성화를 하겠다는 것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서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경제비전을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다른 연구기관 관계자도 “규제를 완화해서 투자를 활성화시키겠다고 하지만 정부가 발표한 대책을 보면 실효성이 있을지 의심이 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고용률 70%’ 정책에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시간제 일자리 등 정부의 대책은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른 연구기관 관계자는 “고용이 늘어나는 것은 경기가 좋아지고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면서 나타는 결과인데, 고용률을 목표로 삼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단기 대책을 쏟아내는 게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면서 “향후 경제상황 등을 감안하면 이명박 정부의 ‘747정책’의 재판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 “경제민주화와 경제활성화 이분법적으로 접근하면 안돼”

전문가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민주화와 경제활성화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극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단기적으로는 경제활성화에 해당하는 투자활성화 등 경기부양 정책을 펼치면서도 장기적으로는 경제민주화를 통해 대기업·제조업 경제구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신광식 교수는 “대기업·제조업 중심 경제구조로는 지속가능한 성장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을 느껴야 하는데, 최근의 행보에는 이런 인식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우리 경제가 구글, MS와 같은 새로운 경제주체들의 등장으로 새로운 성장 모멘텀을 만든 미국의 길로 갈지, 제조업에 집착하다 쇠락한 일본의 길로 갈지 결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민 금융연구원 연구조정실장은 “정부가 목표로 하는 고용률 70%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간제 일자리 등 단기 대책보다는 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노사정 대타협 등의 사회적 합의가 더욱 중요하다”면서 “정부가 이런 대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는 데 역점을 둬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