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박사, 이곳 대덕(大德)은 명당 중의 명당이오. 건설부장관과 함께 헬기를 타고 한번 돌아보시오."

1973년 초 박정희 전 대통령은 청와대를 찾은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박 대통령의 지시대로 그해 11월 30일 건설부가 충남 대덕 일원을 '교육 및 연구단지'로 결정해 고시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 대덕연구개발특구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연구개발(R&D)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1978년 3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을 필두로 지금까지 30개의 정부 출연 연구기관이 입주했다. 초기 1개밖에 없던 기업은 작년 1312개로 늘었다. 이공계 박사는 1만333명으로 우리나라 전체의 12.2%를 차지하고 있고, 총 연구개발비도 6조7000억원에 달하고 있다.

대덕 출연연이 산업 발전 이끌어

대덕특구의 전반기는 정부 연구소가 이끌었다. 강대임 과학기술출연연기관장 협의회장은 "현재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 LG 등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한 것이 출연연구소"라고 말했다.

1986년 3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전북 무주, 경북 고령, 경기 전곡과 가평 등 4개 지역에서 TDX(전자식 전화자동교환기술)의 시범 운영에 성공했다. TDX 개발에 참여했던 ETRI 김명준 박사는 "당시 최순달 원장이 '실패하면 어떤 처벌도 받겠다'는 각서를 쓰기도 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TDX를 기반으로 1996년 세계 최초로 CDMA(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를 상용화했다.

메모리 반도체 1위 신화도 대덕에서 시작됐다. 1989년 ETRI 주도 아래, 삼성반도체통신·금성반도체·현대전자·서울대 등이 세계 최초로 4메가 D램(초고집적 반도체)을 개발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1996년 한국표준형원전을 독자 개발했다. 원전 기술의 독립은 2009년 미국, 프랑스 등을 제치고 UAE 원전을 수주하는 결실로 이어졌다. 국방과학연구원은 1987년 우리나라 유도무기의 효시인 현무 미사일을 개발했다.

정부는 지난 40년간 대덕특구에 30조원을 투자해 CDMA 56조4000억원, D램 9조6000억원 등 300조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IMF 경제위기가 벤처 붐 계기

대덕특구의 후반기는 벤처들의 몫이다. 1997년 닥친 IMF 경제위기는 연구원들의 대량 실직 사태를 불렀다. 출연연에서 2000여명, 기업체 연구소에서 5000여명의 연구원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구소를 떠났다. 이들이 대덕 주변에 벤처를 창업하면서 대덕특구가 신기술 산업화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박성동 쎄트렉아이 대표는 1992년 KAIST 인공위성센터에서 한국 최초의 인공위성 '우리별 1호'를 개발한 주역이다. 하지만 1999년 중복 투자를 줄인다는 명목으로 인공위성센터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50여명의 다른 연구원과 함께 길거리로 내몰렸다.

그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쎄트렉아이를 창업해 세계 3대 소형 위성 제작업체로 발전시켰다.

정부가 2005년 대덕연구단지의 명칭을 대덕연구개발특구로 바꾸고 기술 사업화 지원 정책을 시작하면서 벤처기업은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대덕의 벤처기업은 올해 1000개를 돌파했다.

골프존(실내 골프)·실리콘웍스(반도체)·진합(볼트)·이엘케이(휴대폰발광소자)·미래생활(화장지)·디와이메탈웍스(자동차부품) 등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한 스타 기업도 6개가 배출됐다. 골프존은 2000년 대덕특구에서 직원 5명으로 출발해 작년 2896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국 스크린 골프장의 80% 이상이 골프존 시스템을 쓴다. 이엘케이는 동국대 물리학과 교수이던 신동혁 대표가 1999년 창업했다. 삼성전자, 모토롤라 등에 휴대폰용 발광소자를 납품하는 업체로 올해 예상 매출액은 3000억원을 넘는다.

작년 대덕특구 코스닥 기업의 총매출과 순이익은 각각 3조6000억원과 1850억원으로 전년 대비 31.2%, 24.8% 늘었다. 같은 기간 국내 전체 코스닥 상장기업의 평균 매출액 증가율(5.2%)과 순이익 증가율(-5.5%)을 크게 웃돌았다.

◇인력과 자금 문제 해결해야


하지만 핵심 연구 인력 유출, 만성적인 자금난 등 대덕특구를 위협하는 요인도 적잖다.

대덕특구에서는 지난 5년간 매년 100명이 넘는 핵심 연구원들이 연구소를 떠나 대학·기업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금 부족도 문제다. 현지에서는 '서울 테헤란 밸리는 성공한 벤처들이 모인 곳이고, 대덕벤처는 기술은 있으나 가난한 기업들의 집합소'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 김철환 바이오제닉스 대표는 "벤처 펀드들이 대부분 서울에 있어, 대덕 벤처기업들은 펀드를 통한 자금 수혈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면서 "정부가 다양한 자금 지원책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대덕연구개발특구

정부가 1973년 11월 30일 충청남도 대덕군 일대를 ‘대덕연구학원도시’로 결정, 고시하면서 조성되기 시작했다. 목표는 서울에 산재한 국공립연구기관을 대덕에 집결시켜 연구 기능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대덕연구단지로 불렸다. 대덕연구단지관리법은 1993년 제정됐다. 2005년 정부는 대덕연구단지를 대덕연구개발특구로 전환해 기술 사업화 지원 정책을 추진했다. 대덕특구에 입주한 첨단기술 기업이나 연구소 기업은 ‘대덕연구개발특구 육성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조세 지원 등 다양한 혜택을 받는다. 대덕특구는 대전광역시 유성구와 대덕구 일대 67.8㎢의 면적에 걸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