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의 IT화'는 피할 수 없는 대세(大勢)다. 차량용 반도체 시장의 중요성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 분야 세계시장 점유율이 1.8%에 불과하다.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 대국임에도 불구하고 고부가가치 영역에서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차량용 반도체는 자동차 내외부의 온도·압력·속도 등 각종 정보를 측정하는 센서·엔진·전자 제어장치 등에 사용되는 핵심 부품이다.

최근 IT가 자동차에 적용되는 범위가 확대되면서 차량용 시스템 반도체는 차량의 핵심 부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엔진 제어 시스템뿐 아니라 GPS(위성추적 장치), 완전 자동 주차, 전자 안전 통제, 야간 투시, 탈선 경보 시스템 등 각종 첨단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차량용 반도체의 역할을 빼놓을 수 있다. 현대차가 최근 출시한 신형 제네시스에도 첨단 기능이 대거 장착됐다. 구동력을 전후 구동축에 자동 배분하는 현대차 최초의 전자식 4륜구동 시스템 'HTRAC(에이치트랙)', 차 간 거리 자동 조절은 물론 자동 정지와 재출발 기능까지 지원하는 '어드밴스드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ASCC)'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기능을 제어하는 것 역시 자동차용 반도체다.

◇일본·유럽·미국 업체가 독식

1970~1980년대만 해도 자동차에서 반도체와 전자 부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차량 가격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현재는 23%로 늘어났다. 경영 컨설팅 업체 맥킨지는 2015년이 되면 자동차 제조원가에서 전장 부품 비중이 40%로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자동차에 첨단 기능이 도입될수록 차량용 반도체 사용이 늘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도체 1000개 들어가는 에쿠스 에쿠스의 강판을 제거하고 나면 차량 내부에 컴퓨터(전자제어장치) 47대가 있고, 그 안에 반도체 칩 1000개가 들어 있다. 이를 이어주는 것이 3.6㎞에 이르는 배선이다.

작년 자동차 한 대당 들어가는 반도체 구입 비용은 평균 35만원 수준이다. 현대·기아차의 작년 글로벌 판매 대수가 700만대를 넘어선 것을 감안하면 한 대당 30만원씩만 잡아도 2조원 이상이다. 이러한 비용은 매년 7%씩 증가하고 있다. 전 세계 차량용 반도체 시장도 작년 244억달러(약 27조원)에서 오는 2016년 306억달러(약 32조원)로 늘어날 전망이다.

차량용 반도체 분야의 세계시장은 자동차 제조 역사가 오래된 유럽, 일본, 미국의 업체들이 장악하고 있다. 제조사별로 보면 일본 르네사스가 작년 매출 28억2000만달러(약 3조원)로 세계시장 1위다. 독일 인피니언이 24억달러, 유럽의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18억9000만달러, 미국 프리스케일 16억8000만달러, 유럽 NXP 14억 7000만달러 등으로 그 뒤를 잇고 있다. 우리나라는 삼성전자가 2억7000만달러, SK하이닉스는 8900만달러, 서울반도체가 39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데 그쳤다.

현대차그룹은 작년 차량용 반도체를 키우겠다고 현대오트론을 출범시켰지만 당초 공언한 대로 수천억, 수조원이 필요한 투자를 단행할지는 미지수다. 차량용 반도체의 특징은 개발에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한 번 상용화에 성공하면 다른 업체가 쉽게 진출할 수 없는 진입 장벽이 생긴다는 점이다.

오트론은 현재 전력용 반도체(차량 전력 흐름을 제어하는 반도체) 등의 분야에서 연구를 진행 중이다. 하지만 상용화에 성공한 사례는 아직 없다. 차량용 CPU(중앙처리장치) 설계 능력은 아직 세계 수준과 거리가 있다는 게 국내 업계의 진단이다.

범용 반도체 시장의 부동의 1위인 삼성전자도 차량용 반도체 분야에 대한 투자를 진행 중이다. 삼성전자 백지호 메모리사업부 상무는 지난 7월 올 2분기 실적 발표회에서 "현재 D램 위주의 차량용 전장 반도체 사업을 스토리지(저장 장치) 쪽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10년을 내다봐야 세계 수준

전문가들은 우리 기업들이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수준을 따라가려면 5~10년가량이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 황연호 프리스케일반도체 한국 지사장은 "외국에서는 자동차에 전자 제품을 사용한 지 30년 정도 됐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10여년밖에 안 됐다"며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들이 빠른 속도로 쫓아가고 있지만, 기술이 워낙 까다롭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긴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삼성전자·LG전자 등 국내 업체들이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 분야에 투자를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구민 국민대 전자공학부 교수는 "LCD(액정표시장치), D램 반도체 등에서 대규모 자본 투자를 통해 단시일 내에 일본을 따라잡았듯이 차량용 반도체 분야도 지금보다 더 많은 투자를 통해 기술 격차를 큰 폭으로 줄여나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