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중순 미국 워싱턴주(州) 시애틀국제공항에서 차로 1시간 떨어진 레드먼드(Redmond)시. 이곳엔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SW) 기업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본사가 있다. 3만 명의 화이트칼라들이 150여 개 건물에서 일하는 이곳은 1990년대 이후 PC 시대를 이끈 사령부다. 윈도·MS워드·인터넷익스플로러 등 PC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써봤을 이 소프트웨어는 모두 MS의 제품이다. 매년 200억달러(21조2200억원)가 넘는 순이익을 소프트웨어로만 벌어들이는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 기업인 MS가 최근 '하드웨어 역량 강화'를 화두로 꺼내 들었다. 삼성전자 등 주요 글로벌 IT 기업들이 너도나도 '소프트웨어 강화'를 내세우는 것과 정반대 움직임이다.

하드웨어 없이는 소프트웨어도 없다

본사 '스튜디오B' 건물에 들어서자 MS의 하드웨어 강화 전략의 일단을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15만달러(약 1억6000만원)짜리 3D 프린터 3대가 쉴 새 없이 작동하며 전자 부품을 찍어내고 있었다. 벽면에는 플라스틱과 금속 등 재료가 쌓여 있고, 직원 책상 위엔 기기 설계도가 놓여 있었다. 전자 제품의 시제품을 만드는 '모델숍(Model Shop)'이었다.

제조업체들은 최근 유지 비용이 많이 드는 자체 모델숍을 없애거나 축소하고 외주를 주는 추세다. 하지만 MS는 거꾸로 모델숍 인력을 늘리고 있다. 빈스 지저스 모델숍 팀장은 "서피스·X박스 등 MS의 시제품은 여기서 만든다"며 "매일 24시간 작업해 6~8개씩 주요 부품을 만들어 디자인팀에 넘기면 다시 수정 요구가 오고 또 고치는 반복 과정을 통해 완벽한 하드웨어를 만든다"고 말했다. 하드웨어 제품의 개발 속도를 빠르게 하고 완성도를 높이는 데 독자 모델숍 강화가 필수라는 이야기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지난 9월 뉴욕에서 연 태블릿PC 신제품 공개 행사에서 관람객들이 ‘서피스프로 2’를 써보고 있다. MS는 서피스 시리즈를 앞세워 애플·삼성전자 등과 태블릿PC 판매 경쟁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MS의 전략 변경에는 '하드웨어 없이는 소프트웨어도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MS가 현재의 '윈도 왕국'을 세울 수 있었던 데는 HP·델 등 제조사들이 윈도 PC를 대량으로 만들어 팔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PC 시장을 급속하게 잠식하고 있는 스마트폰·태블릿PC엔 이런 지원군이 없다. 오히려 삼성전자 등 제조사들이 안드로이드폰을 대량으로 팔며, 구글의 '안드로이드 왕국'이 커지고 있다. MS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하나로 묶어 파는 '원 마이크로소프트' 전략으로 이를 돌파하려고 한다. 남이 안 도와주면 직접 윈도를 탑재한 기기를 만들어 팔겠다는 것이다.

삼성·LG에 위협으로 다가온 MS

MS가 구축하고 있는 하드웨어 진용은 이미 간단치 않은 수준이다. 지난 9월 노키아의 휴대전화 부문을 54억4000만유로(약 7조80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하며 스마트폰 시장에 본격 진입했다. 지난달 22일엔 태블릿PC인 '서피스2' '서피스프로2'를 미국 등 21개국에서 출시했고, 22일엔 차세대 게임기 'X박스원'도 선보였다. 이미 다양한 하드웨어 제품군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지난 2일(현지 시각) 마이크로소프트의 미국 레드먼드 본사 ‘모델숍’. 한 직원의 책상 위에 태블릿PC(서피스2)용 키보드, 엑스박스 원 부품, 휘어지는 마우스 등 제작 중인 각종 하드웨어 시제품들이 널려 있다.

판매에도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X박스원은 지난 8년간 8000만대가 팔린 'X박스 360'을 넘어선다는 계획이다. 예약 주문이 벌써 200만대 가까이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씨넷 등 외신은 최근 "MS가 앞으로 3개월 동안 서피스2·서피스프로2의 1600만대 판매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 마케팅 비용 4억500만달러(약 4300억원)를 쓸 것"이라고 보도했다. 올해 태블릿PC 전체 시장(1억8400만대·가트너 추정)의 10%를 차지해, 단숨에 태블릿 시장의 2위 삼성전자를 따라잡겠다는 목표인 셈이다.

내년 초 노키아 인수 절차를 끝내면 '윈도폰' 공세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윈도폰은 지난 9월 이탈리아의 스마트폰 운영 체제(OS) 시장에서 13.7% 점유율로, 애플(10.2%)을 눌러 2위에 오르는 등 유럽에서 상승세를 타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엔 강력한 소프트웨어 역량을 갖춘 MS가 위협적인 경쟁자가 될 수밖에 없다. 소프트웨어가 주수입원인 MS로선 하드웨어 가격을 낮춰도 상대적으로 타격이 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MS는 작년에 출시한 서피스RT·서피스프로의 판매가 부진하자, 재고 정리 비용으로 9억달러(약 9500억원)의 손실을 떠안으며 저가 밀어내기를 감행했다.

성균관대 정태명 교수(소프트웨어학과)는 "국내 제조사들은 하드웨어 역량은 뛰어나니 소프트웨어 역량을 빨리 길러야 한다"면서 "앞으로 하나의 역량만으로는 MS와 같은 기업과 경쟁하기엔 힘이 부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