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임재용(52)은 1996년 자신의 설계사무소 연 직후에는 단독주택 작업에 주력했다. 일산주택 연작을 통해 건축계에 이름을 알렸고, 충북 청원군 내수읍 묵방리의 주택이나 서울 종로구의 평창동 주택의 경우 각각 한국건축문화 대상, 서울시 건축상 우수상을 받을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주택 연작을 보면 동년배 건축가의 작품에 뒤떨어지지 않는 감각적인 표현력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임재용은 어떤 건축가보다도 현학적 수사를 자제하는 편이다. 절대미(美)에 집착하기보단 건물이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고안하고, 건물을 직접 쓰는 사용자를 중심으로 한 기능적 설계에 주안점을 둔다.

2008년 건축문화대상 우수상, 2009년 서울시 건축상 우수상을 거머쥔 서울석유사옥은 임재용의 화두를 잘 드러내는 건물이다. 그는 이 건물에 대해 "당시 많은 주유소가 사회 변화로 인해 자신의 점유하고 있던 대지에서 사라지고 있었다"며 "사회적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건물의 시스템을 바꿔주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울석유사옥과 경동교회 전경.

서울 중구 장충동1가 광희동 사거리 인근에는 눈길을 끄는 건물이 2개 있다. 남산방향의 장충단로 초입에 있는 경동교회와 임재용이 설계한 서울석유사옥이다. 경동교회는 한국의 1세대 현대건축가로 꼽히는 고(故) 김수근의 작품으로 붉은 벽돌과 담쟁이넝쿨로 중세 고성(古城)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건물이다.

서울석유사옥은 경동교회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외관상으로 보면 1~2층 레벨은 주유소며, 그 위로 주차장과 임대용 사무실, 서울석유사옥 사무실이 올라와 있다.

이 건물은 주유소와 사무실의 이색적인 조합뿐 아니라 경동교회와의 관계가 깊게 고려됐다. 일단 주유소 위로 새로 올린 정방형의 건물은 얇은 회색 철망을 뒤집어쓴 형상이다. 이 때문에 외부에서 보면 주유소 위로 세워진 건물에 대한 시선이 잘게 흐려진다. 또 건물 6~7층에 사선형으로 유리 관을 박아 넣어 층과 층 사이, 외부와 내부를 개방해 관계성을 강조했다.

서울석유사옥 전경.

임재용은 “경동교회는 붉은색 벽돌로 웅대하게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에 무게감이 있었다”며 “철망을 통해 다소 복잡하게 보일 수 있는 외관을 가리는 동시에 공중에 떠 있듯 가벼운 느낌을 연출해 경동교회에 대응했다”고 말했다.

최치헌 서울석유사옥 관리팀장은 “임대인이 거의 디자인회사일 정도로 건물 외관과 내부 동선이 감각적으로 잘 짜인 건물”이라며 “특히 내부에서 경동교회를 여러 각도, 위치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했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 낙성대입구 교차로에 있는 한유그룹 사옥은 주변을 압도하는 스케일과 시시각각 음영을 달리하는 비정형 커튼월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1~2층 레벨은 주유소가 운영되고 있지만, 화려한 건물 외관 덕에 인도(人道)에서도 주유소보다는 건물 몸체를 바라보게 될 정도다.

한유그룹 사옥 전경.

특히 이 건물은 사람으로 치면 심장부에 사각형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에는 서로 다른 각도로 구름다리가 엇갈린다. 초현대적인 느낌을 살리면서도 건물 사용자의 편의와 즐거움을 살렸다는 평가다.

양임근 한유그룹 기획팀장은 "1층이 주유소지만, 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며 “오히려 사진작가들이 찾아올 만큼 건물과 관악산이 묘한 조화를 이뤄 자부심이 높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교육개발원 입구사거리에 있는 ‘SK 주유소 건물’도 최근 이 일대에서 많은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다. 회오리치듯 사선 띠가 1~3층 위에 올려진 건물을 두른 외관뿐 아니라 주유소와 패스트푸드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차량에서 쇼핑이 가능한 상점)가 1~2층 레벨에 함께 들어서 있는 건물이다.

양재동 빌딩 전경.

언뜻 보면 주유소·패스트푸드점 위로 들어선 임대용 사무실이 사선 띠에 갇힌 듯한 인상이지만, 건물 내부에 중정과 나무 데크를 설치해 사용자가 오히려 외부 시선으로 불편함을 겪지 않고 쉴 수 있도록 했다.

임재용은 “다수의 공간이 결합된 건물이기 때문에 건물 내·외부, 저층부 모두를 나름의 생리를 고려해 설계했다”며 “어느 하나 죽은 공간이 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