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8월까지 국내에서 판매된 미국산(産) 일본·독일 브랜드 자동차는 총 1만5209대로, 같은 기간 팔린 미국 브랜드 차량(5551대)의 2.7배로 집계됐다.

일본 업체들이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관세 인하 혜택을 보려고 수입선을 일본에서 미국으로 대거 바꾼 데다, 독일 업체들 역시 유럽산보다 상대적으로 원가가 싼 미국산을 적극적으로 들여오면서 생긴 현상이다. 미국 업체들은 "협정 발효 전부터 우려했던 것처럼, 한·미 FTA의 과실을 다른 나라에서 따먹고 있다"며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혼다, 9종 중 8종이 미국산… 일본산 없어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 통계와 각 업체의 판매 실적을 분석한 결과, 올해 국내에서 판매된 도요타자동차 10대 중 8대의 원산지는 일본이 아닌 미국인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 차종인 중형세단 캠리와 캠리 하이브리드를 포함해 미니밴 시에나, 크로스오버차량 벤자까지, 총 8개 차종 중 4종이 미국산이다. 지난달 말에는 미국산 대형세단 아발론까지 추가되면서, 미국산 차가 5종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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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타와 함께 대표적인 일본 업체인 혼다자동차가 현재 판매하는 차량 중엔 일본산 차량이 한 대도 없다. 시빅과 어코드 같은 주력 세단과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CR-V의 도입선을 미국으로 바꾼 데다, 지난해 말부터 크로스투어·오디세이·파일럿 등 특색있는 다목적 차들을 대거 미국에서 들여오면서 브랜드 국적이 무색할 정도가 됐다. 유일한 일본산 모델이었던 CR-Z는 찾는 사람이 한 달에 10명도 안 돼 최근 수입을 종료했다.

닛산 역시 판매량이 가장 많은 중형세단 알티마를 미국에서 들여오고 있어, 일본 3사(社)의 총 판매량 중 미국산이 62%에 달했다. 한국도요타자동차 이병진 이사는 "아발론 같은 대형세단과 시에나 등 다목적 차들은 미국에서 주로 생산해 해외 각국으로 수출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도 미국산이 들어오는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캠리처럼 일본산이 있음에도 미국산으로 수입선을 바꾼 경우는 관세 혜택 등 여러 장점을 고려한 것"이라고 말했다.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돼 있지 않은 일본에서 만든 캠리는 한국에 수입되는 즉시 8%의 관세가 붙지만, 미국산 캠리는 이의 절반 수준인 4%의 관세만 적용된다. 한·미 FTA 발효 5년차에 접어드는 2016년 3월부터는 관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아도 돼, 가격을 더 낮출 여력이 생긴다. 혼다코리아 관계자는 "최근 몇 년간 엔화 환율이 큰 폭으로 널뛰기했지만, 달러 환율은 상대적으로 변동 폭이 작았던 점도 미국산 차량을 대거 도입하게 된 계기"라고 설명했다.

미국차 판매 증가 효과는 미미

독일 업체들도 적극적으로 미국산 차량을 들여오고 있다. 한·EU FTA가 한·미 FTA보다 먼저 발효돼 유럽 차량 역시 관세 혜택과 각종 인증 절차 간소화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편의 기능을 간소화한 차를 한 번에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는 미국산을 가져오는 편이 원가를 대폭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폴크스바겐이 대표적인 예다. 폭스바겐코리아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미국산 중형세단 파사트를 들여오고 있다. 미국산에는 독일산과 달리 바이제논 헤드램프, LED 주간주행등, 주차보조 시스템, 파노라믹 선루프 등이 없어 가격을 종전보다 480만원이나 싸게 할 수 있었다. 덕분에 판매량도 3배 늘었다.

BMW와 벤츠 등 고급차 업체들은 SUV 주력 시장인 미국 현지에 SUV 생산 기지를 두고 있어, 국내에도 여기서 만든 SUV 차량을 들여오는 중이다. 미국서 만든 BMW X3는 올해 국내에서 1200여대나 판매돼, 크라이슬러 총 판매량의 절반에 달했다.

정작 미국 빅3 업체인 GM(캐딜락)·포드·크라이슬러는 이렇다 할 수혜를 입지 못하고 있다. 작년보다 판매량이 늘어난 곳은 포드뿐이다. 이들이 수입하는 것 중 캐나다와 멕시코산 차량도 상당수 포함돼 있어, 정작 관세 인하 혜택을 못 받는 경우도 있다. 판매 부진의 미국 업체들은 이달에도 대대적인 할인에 들어갔다. 크라이슬러는 대표 세단 300C의 고성능 모델과 지프 그랜드체로키 3.6L 모델을 각각 800만원씩 인하한다고 밝혔다.

KAIDA 윤대성 전무는 "미국 업체들로선 실속도 못 차리는 배 아픈 경우이지만, 미국 경제 전체를 놓고 볼 때는 현지 제조업 가동률을 높이는 측면이 있어서 양면성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