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그림자 금융 아닙니까?"

여의도 모 증권사 대표는 동양그룹 무더기 법정관리 사태로 드러난 '부실 기업어음(CP) 쇼크'를 보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그림자 금융이란 기업들이 은행권 밖에서 돈을 빌리면서, 은행에서 빌릴 때와 같은 엄격한 감독과 규제를 받지 않는 금융 행위를 가리킨다. 올 초부터 중국 금융의 신용경색 우려를 낳으며 글로벌 증시까지 뒤흔들어놓은 것이 '그림자 금융'이었다. '감독 사각지대'에 놓인 그림자 금융은 세계 각지에서 '마구잡이 발행' '묻지마 투자' 등을 양산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유발해왔다.

이번 동양그룹 사태에서도 보듯이 동양그룹 상당수 계열사는 자본 잠식 등으로 인해 정상적인 은행 대출은 물론 회사채 발행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CP 발행을 통해 교묘하게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 왔고, 결국 그 피해는 금융기관이 아니라 개인 투자자들에게 전가되고 있다. 왜 이런 '깜깜이 금융' '그림자 금융'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140조원어치 CP가 발행됐는데도 통합관리 DB가 없다

우선 부실 금융의 새로운 뇌관으로 떠오른 CP에 대한 통합 데이터베이스(DB)가 없다는 것이다. CP는 기본적으로 위험성이 높은 금융이다. 이사회를 거쳐 공시해야 하는 회사채보다 느슨해서, 기업 입장에서는 대표가 결정해 공시할 필요도 없이 발행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CP들이 얼마나 발행돼 누구의 손에 쥐어져 있는지 어떤 금융 당국도 확인할 DB가 없다는 것이다.

예탁결제원이 집계하는 일반 CP의 발행 잔액 규모는 7일 현재 61조7211억원이다. 기업이 자체적인 발행이 어려워 우량 회사의 자산을 담보로 잡아 발행할 수 있는 자산담보부 CP는 77조6500억원이 넘는다. 둘을 합치면 140조원쯤 된다. 여기에 1억원 이상으로 발행되는 CP인 전자 단기 사채가 7조원쯤 된다. 일부 중소기업이 사(私)적으로 발행해서 거래한 CP는 이 통계에 잡히지도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대량으로 발행된 CP들이 누구 손에, 얼마나 쥐어져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CP의 발행·유통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다 보니, 이번 동양사태처럼 계열사끼리 서로 CP를 발행하고 사줘도 문제가 터지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CP를 발행한 기업이 각각 개인과 기관투자자, 계열사 등에 얼마나 팔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증권사 관계자는 "계열사가 발행한 CP를 다른 계열사가 사주는 과정이 확인될 수 있었다면 기관은 물론 개인 투자자들도 기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보다 한발씩 늦는 CP 대응책

CP가 널리 확산된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기업들이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자 정부가 CP의 최장 만기 제한(1년)을 폐지하면서부터다. 기업들은 공시 의무, 이사회 의결 같은 규제가 있는 회사채 대신 사실상 규제 없이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CP로 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2010년 말 73조원에 불과했던 CP 발행액이 지난 5월엔 150조원으로 급증한 데는 이런 요인이 있다.

특히 이번에 문제가 된 동양그룹처럼 증권사를 계열사로 보유한 일부 그룹은 통상 10억원 이상인 CP를 '특정금전신탁'이라는 증권사 상품을 통해 수천만원 단위로 쪼개 팔면서 개인에게도 널리 팔았다.

이런 상황에서 LIG· STX 사태 등 CP 관련 금융 사고가 잇따르자 당국은 CP 관련 규제를 도입했지만 시장에 한발씩 뒤처졌다. 당국은 올 1월부터 전자 단기 사채를 도입해 CP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전자 단기 사채는 전자방식으로 결제되므로 유통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 기업이 얼마나 많은 빚 상환 부담을 지고 있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투자자 입장에서 부실기업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기업들이 투명하게 정보가 공개되는 전자 단기 사채를 피하면서 올 들어 전자 단기 사채 발행 물량은 CP(140여조원)의 5%에 불과한 7조원 발행에 그치고 있다.

자본시장연구원 황세운 박사는 "융통어음에 불과한 CP를 가급적 이른 시일 내 전자 단기 사채로 바꿔가야 하며, 당장은 CP 발행과 관련한 공시를 크게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