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잃게 된 3000만원이 거의 전 재산입니다. CP(기업어음)인지 회사채인지도 잘 모르고 권유를 받고 투자했을 뿐입니다."(요양보호사 손모씨·74)

30일 서울 을지로의 동양증권 본사 영업 창구에는 오전 10시쯤부터 50여명의 투자자가 몰려들었다. 전세 보증금으로 총 1억2000만원을 투자했다는 김모(62·여)씨는 "(휴일인) 어제 증권사로부터 '채권이 만기된다'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오늘 돈을 찾으러 나왔는데 그새 동양그룹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일부 투자자들은 창구 직원에게 "안심하고 투자하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해지하면 안 된다고 하느냐"고 소리쳤다. 법정관리를 신청한 동양 계열사의 회사채와 CP를 산 투자자들은 이날 오전 '자산·채무 동결' 조치로 해지가 불가능했다.

30일 동양그룹 3개 계열사가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하자 투자 손실을 우려하는 고객들이 서울 을지로 동양증권 골드센터에 찾아와 상담을 하고 있다.

심각한 자금난을 겪던 동양그룹이 마침내 핵심 계열사인 ㈜동양, 동양레저, 동양인터내셔널 등 3개사에 대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동양그룹 관련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구입한 투자자들의 막대한 손실이 불가피해질 전망이다. 금융감독원 최수현 원장은 이날 "3개사의 CP와 회사채 투자자의 경우 일부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법정관리 신청을 한 3개사가 발행한 회사채와 CP는 총 1조9334억원어치(예탁결제원 기준)이다. 대략 4만여명 이상의 개인에게 팔려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3개사가 회생하지 못하면 모두 손실처리될 수 있다. 재계서열 47위(공기업 포함)인 동양그룹 법정 관리가 큰 파장을 낳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금융권 차입금보다 회사채와 CP 발행을 통해 시장에서 조달한 금액이 더 큰 만큼, 피해의 상당 부분이 개인 투자자에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99년 대우 회사채 파동 이후 가장 대규모의 회사채 파동이란 얘기도 그래서 나온다.

실제 이날 금감원 발표에서도 이런 우려는 확인되고 있다. 법정관리를 신청한 3개 계열사의 회사채와 CP 중 동양증권이 판매한 규모만도 4만1231명에게, 1조 3311억원어치다. 이 중 개인에게 팔린 것은 4만937명에게, 1조2294억원어치다. 99% 이상이 개미 투자자들에게 팔린 것이다. 이처럼 개인에게 집중된 이유가 있다. 회사채와 CP를 발행할 당시 동양그룹의 신용등급은 투자부적격 등급인 'BB'급이었다. 기관투자가는 동양그룹의 채권을 사실상 살 수 없었다. 또 동양증권은 부실 징후가 보이는 계열사가 발행한 CP와 회사채를 7~8% 후반대의 고금리를 내세워 상대적으로 정보에 어둡고 고수익을 노리는 개인 투자자들에게 팔았다.

완전자본잠식 상태라 회사채 발행은 못하고 CP만 발행한 동양인터내셔널과 동양레저의 경우 회사의 존속 가치보다 청산 가치가 더 크다는 평가도 나온다. 자칫 이들이 발행한 CP가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동양의 회사채 투자자 역시 10~20% 수준의 투자금을 회수하는 데 그칠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업계에선 법정관리에 돌입한 기업의 회사채 투자 회수율은 대개 10% 수준으로 보고 있다. 나중에 기업의 자산 등을 처분한 뒤 투자자들이 돌려받는 회수율이 20%라고 칠 경우 3개사에서만 1조원 이상의 피해가 발생한다.

따라서 3개사 회사채·CP 투자자들은 일단 법원의 기업회생절차 관련 결정만을 바라보게 됐다. 법원의 결정에 따라 투자금과 투자금 지급시기 등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모 증권사 채권 담당자는 "동양그룹이 팔 수 있는 자산이나 부채 규모에 따라 채권 투자자들이 받을 수 있는 투자금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예탁결제원 자료에 따르면, 지금까지 이 3개사를 포함해 동양그룹 계열사가 발행한 회사채와 CP는 2조3144억원(예탁결제원 기준)에, 투자자만도 4만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동양그룹의 회사채와 CP 투자자들은 벌써 소송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금융소비자원 홈페이지로 접수된 투자자들의 피해사례가 3500건 이상이다. 금융투자검사국 관계자는 "투자자들에게 투자 위험성을 제대로 알렸느냐가 소송에서 주요 쟁점이 될 것"이라고 짚었다.

이번 개인 피해자들이 급증한 데는 감독 당국의 책임론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부실기업들이 잇따라 개인 투자자를 상대로 CP와 회사채를 발행해 연명하는 데도 감독 당국이 이에 대해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동양그룹의 경우, 계열 금융사인 동양증권을 통해 부실 계열사의 CP와 회사채를 지난 수년간 집중적으로 팔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막을 수 있는 제도를 너무 늦게 만드는 바람에 '동양 회사채·CP 파동'이 터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