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동양그룹의 계열사 동양레저와 동양인터내셔널은 완전 자본잠식 상태로 정상적인 경영이 힘든 상황이다. 그럼에도 올들어 꾸준히 자금을 조달해 근근히 급한 불을 꺼갈 수 있었던 것은 거의 매일 CP를 발행해 돌려막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9월 이후 내년 2월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CP는 동양인터내셔널 4808억원, 동양레저 4546억원 수준이다. 만기는 대부분 1~3개월로 금리는 연 9% 안팎이다. 이처럼 폭탄돌리기식 대규모 자금조달이 가능했던 이유는 CP가 사실상 금융당국의 관리 감독을 받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어서다.

◆ CP, 발행한도·자격 무제한…될 때까지 돌려막기

CP는 어음법과 자본시장법, 상법 등의 적용을 받고 있지만 발행한도나 발행자격에 제한이 없어 수요만 있으면 무한정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CP 발행 기업은 대부분 CP 만기가 돌아오면 같은 금액을 다시 발행해 상환하는데 발행한도에 제한이 없다 보니 차환발행(만기 시 다시 채권을 발행해 상환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까지 돌려막기를 할 수 있다.

2009년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회사채도 발행자격에 제한이 없어졌지만 발행한도는 이사회가 정하게 돼 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이사회가 회사채 발행한도를 터무니없이 설정하면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주주들로부터 소송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합리적인 수준으로 책정된다"며 "반면 CP는 회사 대표이사가 결정하는 구조여서 CP를 사주는 사람만 있으면 얼마든지 발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CP 발행에 사실상 아무런 제한이 없다 보니 유동성 압박을 받는 기업들은 자연스럽게 CP로 눈을 돌리게 된다. LIG그룹은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LIG건설이 부도 직전인 사실을 알고도 2010년 10월부터 2011년 3월 총 2150억원 규모의 CP를 발행해 590여명의 투자자에게 피해를 준 바 있다. 구자원 LIG 그룹 회장과 구본상 LIG넥스원 부회장은 사기성 CP를 발행한 혐의로 법정 구속됐다. 웅진그룹도 신용등급 하락이 예상되는 시점에서 웅진홀딩스##를 통해 약 1200억원의 CP를 발행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금융당국은 부실기업의 CP 돌려막기가 문제가 되자 다음 달 24일부터 감독을 강화할 계획이다. 증권사 등 CP 판매망을 가진 그룹이 자체 금융사를 이용해 부실 계열사 CP를 판매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동양그룹의 경우 이미 약 1만5900명의 개인투자자가 동양증권 창구를 통해 총 4564억원 규모의 동양레저·동양인터내셔널 CP를 매입한 상태여서 동양그룹이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하면 막대한 피해가 예상된다.

◆ 증권신고서도 대부분 면제…사전방지 한계

CP는 자금조달 기능이 회사채와 유사하지만 발행절차는 간소하다. 대표적인 게 증권신고서다. 회사채를 발행하려는 기업은 금감원에 증권신고서를 내고 심사를 받아야 하지만 CP는 만기가 1년 이상이거나 특정금전신탁(금융기관이 고객의 위탁을 받아 CP 등에 투자한 뒤 운용 수익을 배당하는 상품)에 편입되는 경우에만 증권신고서를 내면 된다. 증권신고서는 투자위험요소나 재무관련 정보를 기재하는 것인데 금감원이 정정 및 보완을 요구할 수 있어 자금을 신속하게 조달하려는 기업들엔 큰 부담이 된다.

유동성 위기를 겪는 기업들은 만기 1년 이내의 CP만 발행하기 때문에 거의 증권신고서를 내지 않는다. 또 만기와 상관없이 50매 미만으로 발행하면 사모로 인정돼 증권신고서 제출이 면제된다. 동양레저나 동양인터내셔널 등이 49억원 이하로 하루에 여러번씩 CP를 발행하는 이유도 증권신고서를 내지 않기 위해서다.

기업이 CP를 발행하고 나서 특정금전신탁에 편입했는지 여부도 사전에 검사할 방법이 없고 사후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들여다보는 구조여서 사전방지에 한계가 있다. 종합자산관리계좌(CMA) 등은 아예 규제 대상에서 제외된다. 금감원 관계자는 "기업이 CP를 발행할 때마다 특정금전신탁에 편입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고 나중에 문제가 생겼거나 제보가 들어오면 검사에 착수한다"며 "증권신고서를 제출하지 않고 CP를 발행한 다음 특정금전신탁에 편입하면 자본시장법 위반으로 제재를 받는다"고 말했다.

동양그룹의 경우 동양레저나 동양인터내셔널 CP 상당 부분을 동양증권 특정금전신탁 고객 계좌로 매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양증권은 지난 2011년 서면 계약서를 받지 않고 계열사 CP를 특정금전신탁 계좌로 매입했다가 금감원에 적발된 바 있다.

한국신용평가의 한 연구위원은 "현 CP 제도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자금 조달이 어려운 기업들이 악용할 수 있는 소지가 있다"며 "CP 발행 규모가 큰 기업들이 부실해지면 금융시장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기 때문에 CP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