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박이라 세정과미래 대표

과거 재벌가(家) 딸들은 늘 뒷전에 머물러야 했다. 가문은 아들이 이끌어야 한다는 풍조가 만연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아들보다는 딸이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여성들의 사회적 참여가 활발해 지면서 재벌가 딸들도 기업 경영에 속속 뛰어들고 있다. 특히 도드라지는 곳이 유통업계다. 남자들에게는 없는 부드러움과 타고난 감각으로 소비자들을 사로잡는 데다가 리더십까지 갖추면서 딸들의 경영능력이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13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최근 단연 행보가 두드러지는 오너 2세 딸은 이부진 호텔신라(008770)사장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첫째 딸로 핵심 계열사인 호텔신라와 신라면세점을 최고급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면세점에는 절대 입점하지 않는다는 프랑스 명품 루이비통을 세계 최초로 인천공항에 유치하는 데 성공했고 최근에는 800억원이 넘는 돈을 들여 호텔신라 리모델링까지 마쳤다.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

이부진 사장에 이어 빼놓을수 없는 우먼파워는 동생 이서현 제일모직부사장이다. 톡톡 튀는 패셔니스타로 유통업계 오너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글로벌 SPA(제조일괄화의류)에 맞서 새 SPA(패스트패션)브랜드인 '에잇세컨즈'를 출시하고 럭셔리 편집숍인 10꼬르소꼬모 개점과 '띠어리'와 '토리버치', '이세이미야케'에 더불어 이탈리아 콜롬보백 인수까지 뛰어난 추진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 아웃도어 열풍에 맞춰 빈폴 아웃도어까지 브랜드를 다각화하면서 발빠른 대응을 보여주고 있다.

정유경 신세계(004170)부사장도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 부사장은 로드아일랜드디자인학교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던 남다른 감각으로 신세계그룹의 브랜드를 책임져 왔다. 신세계의 고급스러운 브랜드를 정착시켰다는 평가다. 다만 최근 계열사 부당지원 혐의로 연루되기도 했다. 최근 검찰은 계열사 부당지원 혐의로 신세계 경영진 3명을 기소했는데 이 계열사(신세계SVN)는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이 운영한 계열사다.

유독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는 오너 2세는 대상(001680)그룹 장녀 임세령 상무다. 이재용 삼성전자(005930)부회장과 결혼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받은후, 2009년 돌연 이혼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임 상무는 지난해부터 식품사업총괄 부문을 이끌면서 ‘청정원’ 브랜드로 유명한 대상의 식품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외식사업에도 관심이 많아 최근 개인 소유의 레스토랑까지 운영하는 등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여동생인 임상민 씨도 대상의 핵심부서인 전략기획본부 부본부장을 맡으며 경영수업에 적극 관여하고 있다.

대상 임세령 상무, 임상민 부본부장 (왼쪽부터)

노스페이스로 대박을 낸 영원무역홀딩스(009970)성기학 회장의 딸들도 경영에 깊숙히 관여하며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성 회장은 슬하에 딸만 셋(시은·래은·가은)을 두고 있다. 장녀인 성시은씨는 영원무역홀딩스의 대주주인 와이엠에스에이(YMSA)의 이사를 맡고 있고, 차녀인 성래은씨는 영원무역의 준법(CR)담당 이사를 맡고 있다. 막내인 성가은씨는 영원아웃도어 마케팅팀부터 시작해 이사로 승진, 노스페이스 브랜드 홍보와 영원무역의 광고, 홍보, 마케팅까지 총괄하고 있다.

블랙야크 강태선 회장의 장녀 강주연씨도 경영 일선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주연씨는 지난 2002년 모기업인 동진레저에 입사해 10여년 동안 실무를 거쳐 지난해 ‘마모트’를 전개하는 블랙야크 별도법인 아우트로의 대표로 취임했다. 마모트는 지난 5월 1호점인 논현점을 오픈한 후 1달여만에 30호까지 확장하는 등 시장 공략을 가속화하고 있다.

인디안, 센터폴, 올리비아로렌 등으로 유명한 세정그룹 박순호 회장의 딸 박이라씨도 활발할 경영활동에 나서고 있다. 계열사인 세정과미래 대표를 맡아 운영하고 있으며, 남편인 김경규 상무와 함께 최근 세정그룹이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통합유통브랜드 ‘웰메이드’ 사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크로커다일레이디와 노스케이프, 올리비아하슬러 등의 브랜드로 유명한 형지그룹 최병오 회장의 딸 최혜원씨도 활발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혜원씨는 형지의 이사를 맡아 착실히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동양그룹 현재현 회장의 차녀 현경담씨는 동양네트웍스의 패션부문사업본부장을 맡고 있다. 패션사업에서는 실질적 대표라 할 수 있다. 패션에 대한 본인의 관심과 애정이 남달라 올해 공격적인 사업 확장에 나설 것으로 밝히고 있다. 편집숍 ‘매그앤매그’를 직접 운영하고 남성캐주얼 ‘윈디클럽’의 리뉴얼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다만 그룹의 자금사정이 좋지 않다는 때문에 활동에 제한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지만, 앞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딸은 서경배 아모레퍼시픽(090430)회장의 장녀 서민정씨다. 민정씨는 아모레퍼시픽 그룹의 브랜드숍인 이니스프리와 에뛰드 지분을 각각 18.18%, 19.52% 보유하고 있다. 서 회장이 보유했던 지분을 민정씨에게 고스란히 물려주면서 우량 비상장 자회사 두 곳의 2대 주주로 등극했다. 민정씨는 1991년생으로 아직 미국 코넬대에서 재학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나이가 어려 서 회장이 당분간 경영권은 그대로 유지하겠지만 향후 몇 년 안에 자연스럽게 경영권 승계가 이뤄질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유통업계가 보수적이긴 하지만, 업계 특성상 소비자들과 밀접하게 활동이 이뤄져야 한다는 측면에서 세심하고 꼼꼼한 오너2세 여성 기업인들이 주목을 받고 있는 것 같다”며 “과거 아들만 선호했던 분위기에서 최근에는 딸이어도 훌륭하게 가업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재벌가의 인식 변화도 한 몫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