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크스바겐 그룹을 이끄는 페르디난트 피에히 감독 이사회 의장은 포르쉐의 창업자인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외손자다. 폴크스바겐을 이끌던 그는 최근 포르쉐 박사의 친손자인 볼프강 포르쉐가 이끄는 포르쉐와 벌인 경영권 전쟁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포르쉐는 폴크스바겐 인수를 시도했지만, 결국 폴크스바겐이 포르쉐를 인수하는 것으로 이 전쟁은 끝이 났다.

지난 9일(현지시각) 페르디난트 피에히 폴크스바겐 그룹 감독 이사회 의장(윗줄 오른쪽)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폴크스바겐 그룹 나이트'에 참석해 소개를 받고 있다.

창업자인 포르쉐 박사는 1931년 독일 스투트가르트에서 포르쉐를 설립했다. 초기 포르쉐는 자동차를 설계하는 설계사무소로 출발했다. 경주용 자동차를 설계하며 이름을 날리던 포르쉐 박사에게 히틀러는 1934년 독일인 누구나 사서 탈 수 있는 국민차를 개발하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차가 딱정벌레 모양의 독일 국민차 '비틀'이다.
히틀러는 이 차를 개발할 공장을 세우기로 하고 초대 회장에 포르쉐 박사를 선임했다. 폴크스바겐 공장에서는 1940년대부터 비행기 부품도 생산됐다.
포르쉐 박사에게는 루이제라는 딸도 있었다. 루이제의 남편인 안톤 피에히 역시 경영의 핵심 역할을 하다 전쟁이 끝난 후 나치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포르쉐 박사와 함께 연합군에게 끌려가 투옥되기도 했다. 루이제가 안톤 피에히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오늘날 폴크스바겐 그룹의 1인자인 페르디난트 피에히 감독 이사회 의장이다. 포르쉐 박사의 외손자인 셈이다.

포르쉐 창업자인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운데)가 손자인 알렉산터 포르쉐(왼쪽)와 페르디난트 피에히(오른쪽)에게 356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피에히 의장은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대에서 졸업 작품으로 포뮬러1(F1) 그랑프리용 엔진을 제작할 정도로 자동차 기술에 관심이 많은 엔지니어 출신이다. 이후 그의 초기 경력도 모두 자동차 개발 부문에 집중돼 있다.
포르쉐의 지분을 똑같이 나눠갖고 있던 포르쉐가(家)와 피에히가는 잦은 분쟁을 겪다 1970년 전문 경영인을 영입하고 가족들은 모두 경영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포르쉐 박사의 아들인 페리 포르쉐는 포르쉐 감독 이사회 의장을 맡기로 했으며, 이 시기 개발 부문을 맡아 경주용 차를 개발하던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포르쉐를 떠나 다임러 벤츠에서 잠시 일하다 아우디 개발 책임자를 맡게 됐다.
아우디에서 일하는 동안 피에히는 당시로써는 첨단 기술인 알루미늄 차체와 상시 사륜구동 시스템(콰트로)을 개발했다. 기술력과 브랜드가 일천하던 아우디는 1973년 그가 개발 책임자로 임명된 지 10여년 만에 자동차 경주에서 우승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오늘날 폴크스바겐 그룹의 주력 엔진이 된 TDI(디젤 터보 직분사)엔진도 개발됐다. 피에히는 1975년부터는 폴크스바겐의 엔진과 변속기 개발 담당도 겸임했다. 폴크스바겐의 주력 기술 역시 그의 손을 거친 것이다.
피에히는 1988년 아우디의 회장으로 선출됐다. 여전히 포르쉐와 피에히 가문은 포르쉐의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긴 채 대주주 지위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1993년 그는 폴크스바겐의 회장에 올라 다시 포르쉐 자손의 경영 시대를 열었다. 당시 폴크스바겐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폴크스바겐은 1991년에만 7억7000만 마르크의 영업 손실을 기록했다. 생산성도 경쟁 업체들보다 한참 뒤떨어졌고, 인수했던 스코다와 세아트 등의 브랜드 때문에 손실은 더 커져갔다.

아우디 A100과 포즈를 취한 페르디난트 피에히

피에히는 회장 취임 이후 스코다와 세아트의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한편 폴크스바겐에 대한 강도 높은 자구책도 시행했다. 1993년 폴크스바겐은 국내에만 3만명의 과잉 인력을 고용하고 있었다. 임금은 포드나 오펠보다 20%나 높았다. 피에히는 노조와의 협상을 통해 주 4일 근무로 근무 일수를 줄이면서 임금도 줄이는 방식으로 고용 안정과 비용 절감을 동시에 이뤘다.
피에히 회장은 또 오늘날 일반화된 플랫폼 공유를 통해 비용을 절감하고 폴크스바겐 그룹을 최고의 생산성을 가진 자동차 회사로 탈바꿈시켰다. 플랫폼 공유는 한 군데서 개발한 뼈대를 다른 브랜드도 사용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예들 들어 골프 4세대에 쓰인 'A 플랫폼'은 나중에 폴크스바겐의 보라, 비틀, 아우디 A3와 TT, TT로드스터, 스코다의 옥타비아, 세아트의 톨레도 등 12개 모델에 쓰였다. 엄청난 개발비를 아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마틴 빈터콘 현 회장에게 폴크스바겐 회장 자리를 넘기고, 그룹의 감독 이사회 의장으로 물러난 피에히는 여전히 폴크스바겐 그룹의 일인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피에히 의장을 말할 때면 빠지지 않는 것이 여성 편력이다. 대학생 때 첫 부인인 코리나와 결혼한 그는 코리나와 5명의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사촌 동생인 게르크 포르쉐의 부인인 말레네와 사랑에 빠지는 사이가 됐고, 두 사람은 각각 배우자와 이혼하며 함께 살기 시작했다. 피에히와 말레네는 결혼은 하지 않고 12년 동안을 함께 살았다. 피에히는 말레네와 세 명의 아이를 낳았고, 다른 여성과도 두 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이후 그는 말레네와 결별하고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던 우줄라와 결혼을 했다. 19살 차이가 나는 이들은 3명의 아이를 낳았다.

페르디난트 피에히 폴크스바겐 그룹 감독 이사회 의장(왼쪽 두번째)이 지난해 4월 볼프스부르크에 있는 본사에서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운데)와 앙겔라 메르켈(오른쪽 두번째) 독일 총리와 포즈를 취했다.

그는 또 다혈질 성격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그는 GM의 유능한 경영인인 호세 이그나시오 로페즈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GM과 한바탕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GM은 당시 ‘최악의 자동차 산업 스파이 스캔들’이라고 폴크스바겐을 강하게 공격했는데, 당시 언론은 피에히 의장이 흥분한 모습의 사진을 싣고 떠버리라고 조롱을 하기도 했다. 피에히 의장은 훗날 자서전에서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져 있어 상대방을 불필요하게 자극했을 수도 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