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원구의 아파트에 전세로 사는 회사원 강모(46)씨는 지난달 법원으로부터 통지서를 받았다. 살고 있는 아파트가 경매에 부쳐졌으니 임차인은 배당요구신청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지난해 초 강씨가 입주하기 전, 이 집은 7000만원가량 융자가 있었다. 융자 금액이 많지 않고 전세금(2억5000만원)이 싼 편이라 두 눈 질끈 감고 입주했다.

하지만 현재 이 집의 시세는 4억원가량. 경매에서 2번만 유찰되면 전세금 일부를 날릴 상황이다. 집주인이 저축은행에서 추가 대출까지 받은 데다, 은행 이자를 6개월 동안 연체한 것이 이유였다. 강씨는 "집주인이 은행 이자를 연체하는지 세입자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상황이 이렇게 되도록 집주인은 물론 은행에서도 단 한마디도 알려주지 않아 전세금을 날릴 처지가 됐다"고 푸념했다.

4~5년 사이 집값이 하락하고 전세금은 치솟아 '깡통전세'가 속출하고 있지만, 전세 세입자에 대한 안전장치가 전혀 없어 피해가 더 커지고 있다. 최근 금융감독원이 시중은행 10여곳을 조사한 결과, '집주인이 주택 담보대출을 연체하고 있어 전세 보증금을 떼일 우려가 있으니 주의하라'고 세입자에게 미리 통보해주는 은행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금감원, 집주인의 대출금 연체 사실 세입자에 통보 추진

금감원은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집주인 담보대출의 이자가 3개월 이상 연체되면 은행이 '대출 연체로 전세 세입자에게 전세 보증금을 떼일 우려가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의 통지서를 전세 세입자에게 미리 알려주도록 하는 제도 개선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은행은 보통 주택 담보대출 이자가 3개월 이상 연체되면 부실채권으로 간주해 6개월가량 독촉 등 채권 추심 활동을 벌이다 원리금의 전액 회수가 어렵다고 판단되면 경매에 넘기게 된다. 문제는 전세 세입자는 법원에서 경매 개시 결정이 나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세입자가 집이 경매에 넘어갈 것을 미리 알게 되면 주인과 담판을 지어 전세금을 일부라도 회수하는 등의 자구노력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은행들은 금감원의 이런 주문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우선 등기부등본상에 전세 세입자는 표시되지 않아 은행이 세입자가 누구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또 개인신용정보를 제3자인 세입자에게 알려주면 은행법 위반이 된다는 점을 거론하고 있다. A은행 관계자는 "연체 사실을 알려주려면 집주인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어떤 집주인이 동의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전세금 중간에 올려주면, 경매에선 후순위로 밀려

최근 전세금이 급등하면서 전세 재계약 때 전세금을 올려주는 일이 일반화된 것도 깡통전세의 위험도를 높이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세입자가 은행 융자 등이 없는 '깨끗한' 전셋집을 계약했다고 하더라도, 집주인은 세입자에게 알리지 않고 전셋집을 은행 등에 담보로 맡기고 추가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이런 경우 집이 경매에 넘어가면 전세금이 1순위 채권이 되고, 대출금이 2순위 채권이 돼 전세금 회수에 문제가 없다. 그러나 살던 도중 전세금이 올라 재계약을 할 때 세입자가 등기부등본을 확인하지 않고 전세금을 올려 주는 계약을 맺게 되면 올려준 전세금만큼은 경매에서 3순위 채권으로 밀려나게 된다.

경매전문 업체 '이웰에셋'의 이영진 부사장은 "세입자가 재계약 때 등기부등본을 확인하지 않거나, 전세 계약을 먼저 했으니 올려준 전세금도 1순위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최근 법원 경매에서 올려준 전세금을 날려버리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경매 넘어가면 세입자 10명 중 8명은 전세금 못 찾아

전세 세입자를 위한 안전장치가 부족한 상황이지만, 주택시장에선 '깡통전세'가 매년 늘어나고 있다. 경매정보 업체인 '부동산 태인' 조사에 따르면 올해 법원 경매로 넘어간 수도권 아파트에 설정된 근저당 금액은 감정가격과 비교해 112%에 달한다. 2011년 83%에 불과하던 이 비율은 지난해 108%로 오른 데 이어 올해 4%가량 더 올랐다. 집값이 하락하는 가운데 집주인들이 집을 담보로 최대한 빚을 끌어다 쓰는 일이 늘었기 때문이다.

법원 경매에서 낙찰됐지만 낙찰가격이 낮아 세입자들이 전세금을 되찾지 못한 주택의 비율도 2011년 75.5%에서 올해 79.4%로 치솟았다. 경매에 넘어가면 전세 세입자 10명 중 8명은 전세금을 온전히 돌려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부동산태인 정대홍 팀장은 "전세금 반환 보증보험을 활성화해 세입자 스스로 안전장치를 만들 수 있도록 하고, 법 개정을 통해 은행이 집주인의 대출 연체 사실을 세입자에게 통보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