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에는 잔잔한 물속의 시한폭탄이 있다. 바로 수조(水槽)에 저장하고 있는 사용후핵연료, 폐연료봉들이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사용후핵연료 저장 수조의 냉각수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대규모 방사능 유출의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다. 더구나 국내 원전의 사용후핵연료 저장 능력은 포화 상태에 이르고 있다. 새로운 저장 시설이 필요하지만, 주민 반대와 부지 확보 문제로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막을 방안이 시급한 실정이다.

냉각수 확보가 폐연료봉 안전 핵심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났을 때 전 세계의 관심은 4호기 수조에 잠겨 있는 사용후핵연료로 쏠렸다. 원전이 침수되면서 전기가 끊기자 냉각수 펌프도 멈췄다. 수조 온도는 올라가고, 남은 냉각수는 계속 증발했다. 자위대가 헬기까지 동원해 필사적으로 바닷물을 퍼부어 대규모 방사능 유출 사고는 막을 수 있었다.

원전에서 나온 폐연료봉은 핵분열은 멈췄지만 여전히 엄청난 열을 갖고 있다. 아궁이에서 바로 꺼낸 연탄재가 여전히 뜨거운 것과 같다. 냉각수가 바닥나면 폐연료봉에서 대기 중으로 방사능이 유출된다. 또 피복에 있는 지르코늄이 수증기와 반응하면서 수소가 대거 발생해 폭발 위험도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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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사고 후 정부는 국내 원전에 전기 공급이 끊기더라도 사용후핵연료 저장 수조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했다. 한국수력원자력 관계자는 "외부 탱크에서 수조까지 물을 공급하는 배관을 연결하고, 비상 상황에선 소방차가 접근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선했다"고 말했다. 전기가 없어도 중력에 의해 자연적으로 물을 쏟아부을 탱크를 수조 위에 설치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코앞에 닥친 저장 공간 포화 시기

더 큰 문제는 국내 사용후핵연료 저장 능력이 포화 상태란 사실이다. 핵연료의 교체 주기는 대략 5년, 원전 운영사인 한수원은 대략 1년 반마다 돌아오는 예방 정비 기간에 사용한 핵연료의 3분의 1씩을 교체한다. 해마다 국내 원전 23기에서 나오는 사용후핵연료의 양은 약 700t에 이른다.

부산 기장 고리원전을 비롯해 경북 경주 월성, 경북 울진 한울, 전남 영광 한빛 등 4개 원전 본부에 모두 1만8000t을 저장할 수 있는데 지난 6월 말까지 이미 72%인 1만3000t이 찬 상태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오는 2016년 고리원전부터 월성원전(2018년), 한빛원전(2019년), 한울원전(2021년) 순으로 사용후핵연료 포화 시기가 닥친다. 수조에 더 촘촘하게 보관하는 설비를 갖춘다고 하더라도 2024년 한빛원전부터 포화를 막을 수는 없다.

대안은 수조에 넣은 지 5년 이상 지난 폐연료봉은 밖으로 꺼내 금속이나 콘크리트 용기에 넣고 중간저장시설에서 50년간 보관하는 것이다. 일본은 두께 25㎝, 높이 5.4m 금속용기를 쓴다. 바닷속 200m 압력에도 견디고 섭씨 800도 불에도 끄떡없도록 설계됐다. 보관창고도 자연 환기방식을 이용해 전기가 끊겨도 문제가 없게 했다. 서울대 서균렬 교수는 "억지로 수조 저장 밀도를 높이다가 행여 사고가 나면 밀착된 폐연료봉에서 핵분열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며 "원자로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뜨거운 연료봉은 수조에, 충분히 식은 연료봉은 바깥에 보관하는 것이 안전에도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중간저장시설 공론화해야

우리나라는 사용후핵연료를 지하 깊은 곳에 보관하는 영구처분 시설에 대해서는 방침이 없다. 지난해 사용후핵연료 정책포럼은 늦어도 2024년 이전에 폐연료봉을 용기에 담아 보관하는 중간저장시설을 지어야 한다고 정부에 권고했다.

하지만 정부는 눈치를 보고 있다. 지난달 말에야 공론화위원을 선정할 위원추천위원회만 겨우 꾸렸을 뿐이다. 기존 원전에 중간저장시설을 두자니 지역 주민의 반대가 두렵고, 별도 저장 시설을 지어 모든 원전의 사용후핵연료를 모으자니 부지 확보가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국민대 목진휴 교수(행정학)는 "사용후핵연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10년 후 한빛(영광)원전부터 가동을 못 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며 "법령을 정비하고 국민 의견을 모으는 공론화 과정이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