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연수구에 있는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부설 극지연구소의 빙하(氷河) 연구실.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엄청난 냉기가 쏟아졌다. 밖은 섭씨 30도를 넘는 불볕더위인데 철문 안은 영하 20도로 꽁꽁 얼어붙었다. 연구원들은 전신 방한복과 귀마개,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로 완전무장했다. 정지웅 극지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워낙 온도가 낮아 두세 시간 일하고 나오면 여름철 병든 닭처럼 기운이 쏙 빠진다"고 했다.

혹한의 연구실에선 남·북극과 그린란드의 빙하에서 가져온 얼음 기둥인 '빙하 코어(ice core)'를 통해 지구온난화를 연구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한국·미국·일본·중국·덴마크 등 14개국 과학자들이 2007년부터 빙하 코어를 채취해 지구온난화를 연구하는 '님(NEEM·North Greenland Eemian Ice Drilling)'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현재 국제 연구진은 시추 비용만 100억원을 들여 11만5000~13만년 전에 생성된 깊이 2.5㎞의 빙하 코어를 채취, 각각 분야를 나눠 분석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정지웅 선임연구원은 "과거를 통해 미래의 지구온난화를 예측하고 준비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했다.

자연이 준 천연 타임캡슐 '빙하 코어'

이 연구가 가능한 것은 빙하 코어의 특성 때문이다. 빙하 코어는 수십만 년 동안 내린 눈이 쌓여 만들어진 빙하에 석유 시추하듯 수㎞의 깊이로 파이프를 박아 채취한 원통형 얼음 덩어리. 깊은 곳의 얼음 덩어리는 그만큼 먼 과거의 눈을 간직하고 있다. 극지연구소 허순도 박사는 "눈은 대기의 먼지, 화산재, 우주 물질, 중금속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며 "빙하 코어를 분석하면 당시의 대기를 복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극지(極地) 깊은 곳에서 시추한 빙하 코어가 수십만 년 전 지구 대기를 알려주는 '천연 타임캡슐'로 불리는 이유다.

국제 공동 연구진은 그동안 채취한 그린란드 빙하 코어의 이산화탄소 농도, 질소 동위원소 비율, 중금속 비율 등의 분석 작업을 국가별로 분담해 당시의 지구 대기를 재현하는 작업을 해왔다. 우리나라는 중금속 비율 분석을 맡았다.

"12만8000년 전부터 7000년간 지구온난화 있었다"

한국을 포함한 국제 연구진은 최근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지금으로부터 12만8000년 전부터 12만1000년 전까지 7000년간 지구온난화가 있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또 "이 시기 북서 그린란드에 있는 빙하의 두께가 약 400m 줄었고, 12만1000년 전에는 고도가 지금보다 130m 낮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밝혔다.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높아져 고도가 낮아졌다는 것이다.

극지연구소 연구원들이 그린란드에서 채취한 빙하 코어(ice core)의 지름을 측정하고 있다. 극지연구소 연구원들은 채취할 때와 비슷한 환경에서 빙하 코어를 보관하고자, 섭씨 영하 20도에서 작업한다.

연구진은 최근의 지구온난화는 주로 대기 오염 때문이지만 당시의 지구온난화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 궤도가 변하면서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구가 태양의 복사열을 많이 받는 위치에 놓이면서 지구온난화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또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 요인이 북극 주위의 그린란드 빙하보다는 서남극 대륙의 빙상(�床·대륙 빙하)이 많이 녹아서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지구온난화가 자연적인 변화로도 올 수 있는 것인 만큼 여기에 대기 오염까지 겹치면 지구온난화가 더 심해질 수 있다는 추론도 가능해진 것이다.

극지연구소는 이 연구와는 별도로 최근 유럽 국가들이 주도하는 EPICA라는 남극 빙하 코어 채취 프로젝트에도 참가 중이다. 지난 80만년간의 빙하 코어를 분석하는 EPICA 프로젝트는 NEEM 프로젝트보다 연구 범위가 넓다. 극지연구소 허순도 박사는 "80만년간의 지구 대기를 추적하면 지구온난화의 추이를 좀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빙하 연구실 온도 못 낮춰 연구에 애로"

시추와 운송비를 따지면 빙하 코어는 1㎥당 1000만원이 넘는 고가품이다. 극지연구소는 빙하 코어를 극지와 유사한 영하 20도의 혹한에서 보관한다. 하지만 정지웅 연구원은 "빙하 연구실 온도를 더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채취 전 극지의 얼음 덩어리는 다른 얼음 덩어리가 누른 엄청난 압력을 겪지만 연구실의 빙하 코어는 그런 압력을 받지 않는다. 이 때문에 빙하 코어의 눈 분자들은 원래보다 결속된 정도가 덜하다. 이 효과를 내기 위해 일본의 극지연구소는 영하 50도에서 빙하 코어를 보관한다. 하지만 국내에선 예산 부족으로 온도를 더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정 연구원은 "상황이 이런 만큼 채취한 빙하 코어에 대한 분석을 신속하게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