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간 기업 정보 소프트웨어(SW) 기술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이스윙사(社)가 지난 3월 폐업했다. 사장 백남웅(52)씨는 서울 잠실의 아파트를 경매로 넘기고 인천 구월동의 누나 집에 얹혀산다. 아내와 자식들은 처가로 갔다. 이 회사는 직원 20여명에 불과하지만 대학 정보화 시장에선 1~2위의 기술력을 인정받는 강소(强小) 기업이었다. 왜 망했을까. IT 업계 전문가들은 "하도급·재하도급이라는 한국 SW 생태계의 갑을병정(甲乙丙丁) 먹이사슬에 먹힌 것"이라고 했다.

이스윙의 위기는 작년에 S대학이 발주한 정보화 시스템 구축 사업에 2차 하도급 업체로 참여하면서 찾아왔다. S대는 시가 60억원짜리 입찰을 냈고, D사는 이를 70%(42억원) 가격에 저가 수주했다. D사는 교무, 학사 관리, 인사 등 분야별로 나눠 이스윙 등 3개 업체에 하도급을 줬다. 이스윙은 이 가운데 학사 관리 시스템을 7억8000만원에 수주했다. 백씨는 "원가로 따지면 10억원 정도인데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그 가격에 계약을 했다"며 "다신 소프트웨어 사업은 안 한다"고 했다.

하도급에 재하도급… 창의적 개발 어려운 현실

2011년 당시 경력 2년차였던 이모(32)씨는 정부 발주 정보화 사업의 핵심 소프트웨어 개발을 7개월간 수행했다. 이씨는 프리랜서 프로그래머로 인력 파견 업체와 계약을 하고 참여했다. 행정안전부(현 안전행정부)가 산하기관인 한국지역정보개발원을 통해 발주한 190억원 규모의 도로명 주소 정보화, 지자체 운영 환경 개선 사업이었다.

서울 구로구 구로동의 한 소프트웨어 업체 사무실 구석에 간이침대와 걸레가 놓여 있다. 야근을 밥 먹듯 하는 업계 특성 때문에 이 회사 총각 직원은 아예 집에 가지 않고 사무실 간이침대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다. /이명원 기자<br>▲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그래픽 뉴스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당초 사업을 총괄 수주한 곳은 대기업 S사. S사는 지리 정보 시스템(GIS) 전문 기업 H사 등 5개 업체에 하도급을 줬다. 이 중 H사가 수주한 금액은 35억원이었다. H사는 이 중 소프트웨어 개발 부분을 나눠 4개 업체에 재하도급을 줬다. 재하도급 업체 중 한 곳인 I사는 자사가 맡은 6000만원 소프트웨어 개발건을 다시 인력 파견 업체 W사에 3000만원을 주기로 하고 통째로 넘겼다. W사는 이씨에게 2100만원을 주고 900만원을 챙겼다. 한국지역정보개발원→S사→H사→I사→W사→프로그래머 이씨로 이어진 6단계 하도급 구조였다.

이 과정에서 프로젝트 완성도는 뒷전이었다. 이씨는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할 일을 일찍 끝내면 다른 일까지 떠맡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끌며 주어진 일만 했다"고 말했다.

SW 개발은 한 사람의 창의성이 수천명의 공동 작업보다 더 뛰어난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다. 평범한 인재 10명은 아무리 시간을 줘도 핵물리학에 쓰이는 고차원 방정식을 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전문가들은 "중층적 하도급 구조에선 저급한 SW들만 양산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인력 부족에 빚만 늘어"…SW 인력의 77%가 전산실 관리

아예 국내 사업을 정리하고 해외로 나갈 것을 고려하는 사업가도 나온다. 모바일 SW 개발 업체 Z사 김상복(49) 사장은 요즘 회사를 영국으로 옮길 것을 검토하고 있다. 30명인 직원도 일단 절반으로 줄일 계획이다. Z사는 2009년 창업 후 국토해양부, 외교부, 중소기업청 등 매년 10곳 정도의 공공기관에서 발주한 유지 보수 일을 해온 유망 중소기업이었다. 김 사장은 "열악한 환경 때문에 인력 공급이 안 되다 보니 인건비가 올라가 빚만 늘고 있다"고 말했다.

제대로 된 SW 하나만 개발해도 '대박'을 터트리는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좋은 학벌의 개발자들이 소프트웨어 개발보다는 전산 관리직을 선호한다. 대기업·은행 등의 전산 관리직으로 취직해 지시를 내리는 '갑'을 한다. '소프트웨어 코딩'(software coding·특정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컴퓨터 언어로 프로그램을 짜는 일)은 꺼린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에 따르면 2011년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인력은 73만명이지만 56만명(77%)이 전산실 관리 인력이다. SW 개발자는 17만명에 불과하다.

국내 최고의 SW 기업으로 불리는 안랩조차도 세계시장에선 무명(無名)이다. 작년 매출 1315억원 가운데 수출은 겨우 7%(87억원)에 불과하다. 그나마 내수시장을 지키는 이유는 보안 SW의 경우 국가별로 자국 제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국내 최고 SW 업체조차 '우물 안 개구리' 신세인 셈이다.

2011년 현재 국내 소프트웨어 기업 숫자는 총 6678개. 이 중 매출 10억원 이하 영세 기업이 전체의 44.0%에 달한다. 이정근 한국소프트웨어전문기업협회 회장은 "1등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게 SW 시장"이라며 "최고 수준의 기술력이 필요한 항공기용 SW 같은 분야는 국내에선 손도 못 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