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오랜 침묵을 깨고 투자 계획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2010년 이후 반도체 가격이 폭락해 적자에 시달려 온 해외 반도체 업체들은 한동안 생산 설비를 추가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반도체 가격 상승으로 해외 반도체 업체도 미래를 위한 투자를 생각할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일본 반도체 업체 설비 증설·전환 시작

일본 언론들은 21일 메모리 반도체 제조업체인 도시바가 300억엔(약 3300억원)을 투자해 플래시 메모리 생산 설비를 증설한다고 보도했다. 플래시 메모리는 디지털 카메라·휴대전화의 데이터 저장 장치로 쓰이는 메모리 반도체다. 삼성전자에 이어 세계 2위 플래시 메모리 생산업체인 도시바는 8월 말 미에현 소재 요카이치 공장 플래시 메모리 생산 설비 증설 투자를 시작할 계획이다.

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이어 세계 3위 D램 제조업체인 일본 엘피다는 대만 자회사인 렉스칩에서 생산하는 모바일 D램 생산량을 연말까지 4배 끌어올린다고 발표했다. 모바일 D램은 주로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메모리 반도체다.

불과 1년 전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생존을 걱정하는 처지였다. 도시바는 작년 7월 플래시 메모리 가격 폭락을 이기지 못하고 요카이치 공장 생산량을 30% 줄인다고 발표했다. 엘피다는 작년 2월 아예 파산 신청을 했다. 이후 미국 마이크론이 엘피다를 인수한다고 발표했고 현재 미국 법원의 최종 합병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일본 주요 업체의 잇따른 감산·파산은 오히려 생존의 기회를 다시 모색할 기회를 제공했다. 반도체 생산량이 줄면서 가격이 올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플래시 메모리 가격은 도시바의 감산 소식과 동시에 오르기 시작했다. 작년 6월 말 3.84달러로 최저를 기록한 플래시 메모리 가격은 올 7월 현재 5.52달러다. 반도체 가격 상승의 최대 수혜자는 세계 1·2위 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다. 그만큼 수익성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국내 업계 "투자 규모 작아, 영향 없을 것"

일본 반도체 업체가 부활하면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면서 반도체 가격 폭락 사태가 다시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국내 반도체 업계는 일본 기업의 반도체 투자 계획 발표를 보고 오히려 안도하는 분위기다. 일본 기업들의 이번 투자 계획은 향후 무모한 투자 경쟁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보여 준 것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 박성욱 사장은 "최신형 반도체 생산 라인을 하나 만드는 비용은 7조원"이라고 말했다. 도시바가 투자하겠다는 3000억원으로는 생산라인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다. 도시바는 "3000억원을 투자해 차세대 플래시 메모리를 생산할 공간을 내년 여름까지 만들겠다"며 "장비 투자와 생산은 시장 상황을 고려해 나중에 결정하겠다"고 덧붙였다. 당장은 새 생산 설비를 추가할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다.

엘피다의 모바일 D램 증산도 마찬가지다. 한국투자증권 서원석 연구원은 "기존 PC용 D램 생산 설비를 모바일 D램 생산용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도체 가격 상승과 엔화 약세로 여력이 생긴 일본 업체들이 대규모 신규 설비 투자에 나설 것이라는 걱정은 기우(杞憂)라는 것이다. 사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반도체 업체들이 올 들어 투자에 보수적이다. 작년 1분기 반도체 사업에 5조7600억원을 투자했던 삼성전자가 올해 1분기엔 1조5357억원을 투자했다. SK하이닉스의 1분기 설비 투자는 6220억원에 불과하다. 작년 1분기엔 1조1450억원을 투자했다.

반도체 업계가 투자를 망설이는 이유는 시장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는 올 2분기 전 세계 PC 생산량이 작년보다 10.9% 줄었다고 발표했다. PC에 들어가는 D램 생산 설비를 추가 증설하는 업체는 전 세계를 통틀어 하나도 없다. 지금 D램 가격이 높다고 스마트폰에 밀려 사라지는 PC 시장을 보고 도박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곧 기존 D램과 플래시 메모리를 대체할 차세대 반도체 등장이 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투자를 망설이게 한다. SK하이닉스의 최대주주인 SK텔레콤 하성민 사장은 "2015년쯤 차세대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 연구개발 투자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본격적인 신규 투자 경쟁은 2~3년 후 벌어진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