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콘텐츠 유료화 시대가 막을 올렸다. 영화·음악·만화·출판과 같은 디지털 콘텐츠는 지난 10여년 동안 온라인에서 공짜이거나 공짜와 다름없는 싼값에 유통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다양한 분야에서 디지털 콘텐츠를 제값 받고 유통시키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이미 성공적인 결과도 속속 나오고 있다.

Corbis

◇온라인이 망친 콘텐츠 시장

1990년대 인터넷의 등장 이후 디지털 콘텐츠의 가치는 끝없이 추락했다. 네티즌들은 인터넷에서 불법 다운로드해서 영화와 음악을 즐겼다. 국내 영화 제작사는 9000억원대의 비디오 가게 수입을 잃었다. 미국 최대 비디오·DVD 대여점이었던 블록버스터는 지난 2010년 결국 파산을 맞았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국내 음악 제작사들은 2000년 무료 음원 사이트 '소리바다' 사태를 겪으며, 4000억원대였던 CD·테이프 판매 시장이 한순간에 6분의 1로 추락하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네이버 같은 포털들이 웹툰으로 공짜 만화를 제공하면서 10년 전만 해도 수십개에 달했던 만화 잡지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동네마다 흔했던 만화방은 찾기조차 힘들 정도가 됐다. 신문·잡지 역시 기사가 온라인에서 공짜로 유통되면서 부수 감소라는 위기를 맞았다.

위기의 근본은 디지털 기술의 속성에 있었다. 복제를 거듭하면 화면이 흐려지고 음질이 나빠지는 아날로그와 달리 디지털 콘텐츠는 수백만번 복제해도 품질이 저하되지 않는다. 복제된 콘텐츠는 인터넷을 통해 무제한으로 복제·유통됐고 영화감독·배우·가수·만화가 등 콘텐츠 제작자(creator)들의 주요 수입원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디지털 영화, 20년 전 잃어버린 9000억원대 비디오 가게 수입 되찾나

이병헌의 1인 2역으로 화제를 모은 '광해:왕이 된 남자'는 작년 1200만 관객을 모았다. 극장 상영이 끝난 뒤 올 1월부터 인터넷TV와 디지털케이블에서 '디지털콘텐츠'로 판매했는데, 4개월 동안 무려 83만7000명이 돈을 주고 VOD(Video On Demand·주문형비디오)로 영화를 봤다.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올해 1~4월에 디지털 콘텐츠 판매량이 10만건 넘는 영화만 20편이 넘는다. 7번방의 선물·베를린·박수건달·호빗:뜻밖의 여정·레미제라블·늑대소년·뽀로로 극장판 슈퍼썰매 대모험 등이다. 웬만한 상영작들은 모두 디지털 콘텐츠로서도 성공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극장 관객 수와 디지털 콘텐츠 이용자 수를 비교해보면 이런 추세는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매월 극장 관객 수는 1000만~2000만명 선인데, 디지털 콘텐츠 이용자 수는 200만~300만명이다. 이 숫자는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서 유료로 영화를 내려받은 사람은 제외된 것이다. 이들까지 더하면 디지털 콘텐츠 소비자는 이미 극장 관객 수의 20%를 상회하는 수준으로 올라간 셈이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의 세미나에선 영화 산업 부가시장이 2015년에 1조원대로 성장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작년엔 2100억원 규모였던 점을 고려할 때 폭발적인 성장을 기대한 것이다. 배경엔 인터넷TV·디지털케이블TV 가입자 수 증가에 있다. 2009년만 해도 434만가구에 불과했지만, 최근엔 1250만가구에 달했다. 2015년이면 거의 모든 가정에서 리모컨으로 디지털 영화를 구매해 시청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KT미디어허브의 김주성 대표는 "영화 제작사들에 극장 수입을 제외한 부가 수입이 15% 정도였는데, 디지털 영화가 살아나면서 이제는 25%까지 늘어났다"고 말했다.

실제로 곽현희 주연의 '전망 좋은 집'은 극장 수입보다 IPTV의 디지털 콘텐츠 판매 수입이 4배 이상 많았다. '태극권 7대 고수전' '금의위: 14검의비밀' 등도 디지털 유료화 수입이 극장 수입보다 많았던 영화다. 영화 업계 관계자는 "'서류 개봉'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 '극장 상영작'이란 타이틀을 위해 개봉은 하지만, 실제 타깃은 디지털 유료화에 맞춘 영화란 뜻이다.

이 추세라면 국내 영화 제작사들은 20년 전에 잃어버렸던 비디오 가게 수입을 되찾는 것은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더 큰 수입을 콘텐츠 유통을 통해 벌어들일 수 있을 전망이다.

◇디지털 음원, '헐값 판매' 굴레 벗으려는 시도

음악은 디지털 음원 유료화로 인터넷 시대 이전의 시장 규모를 되찾은 경우다. 멜론·벅스뮤직 등이 주도하는 디지털 음원 시장 규모는 2000년초 CD 판매 시장(4000억원대)를 훌쩍 넘어선 8000억원대로 추정된다.

문제는 디지털 음원의 덤핑 판매가 심해, 가수나 작사·작곡가 등 창작자에게 제대로 된 대가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터넷 음원 시장은 여전히 덤핑 시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문화관광부가 발표한 '디지털 음악시장 현황 및 개선방안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온라인 음원 1곡당 평균 저작권료는 다운로드 10.7원, 스트리밍 0.2원에 불과했다. 한 달에 6000원 정도를 내면 무제한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어 1곡당 평균 음원 판매 가격이 낮은 데다, 멜론·벅스뮤직 등 음원 유통업체가 절반 가까이 가져가기 때문이다. 반면 애플 아이튠스는 1곡당 판매 가격이 0.99~1.29달러(1130~1460원)다. 우리보다 훨씬 비싸다. 유통사인 애플이 가져가는 비율도 30%에 불과하다. 창작자들이 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다.

디지털 음원의 실질적인 유료화, 즉 '제값 받기' 시도는 가수들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인디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은 지난 4월 신곡 '좋다 말았네' 음원 가격을 다운로드받는 이용자가 스스로 정해서 지불하도록 했다. 한 곡에 10원 정도에 판매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현대카드 음원 서비스를 통해 판매한 결과, 네티즌들이 스스로 지불한 평균 가격은 976원이었다. 음원 유통업체인 KT뮤직은 2년 전부터 음악저작권자가 직접 가격을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해, 점진적인 가격 인상을 유도하고 있다.

◇웹툰의 유료화 첫발 내디뎌

'웹툰(Webtoon)=공짜'라는 굴레에 묶여 있던 디지털 만화에서도 유료화 시도가 이어진다.

포털사이트 다음은 지난해 7월 '웹툰 마켓'이라는 부분 유료화 모델을 도입했다. 연재 중인 웹툰은 기존 그대로 무료로 유지하되, 연재가 끝난 웹툰은 돈을 내야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예컨대 지난달 개봉한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원작 웹툰은 결말 부분만을 유료화했다. 앞부분은 무료로 볼 수 있지만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를 보려면 돈을 내야 한다. 네이버도 다음과 유사한 유료화를 시작한 상태다.

지난달에는 웹툰 유료화를 앞세운 벤처 기업도 등장했다. '레진 코믹스'는 같은 디지털 만화지만, 이를 화질에 따라 유·무료로 판매하는 방식이다. 대부분 만화를 무료로 볼 수 있지만, 돈을 낼 경우 남들보다 먼저 더 고화질로 볼 수 있다. 만화 1편에 200~300원 정도인데, 출시 일주일 만에 20만원 넘게 선결제한 열성 독자도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