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소프트웨어 기업의 김진성(가명·43) 대표는 3년 전 회사 설립 당시 평소 친분이 있던 금융회사로부터 5억원을 투자받고, 자기 돈 10억원을 보태 회사를 차렸다. 올 초 김씨는 천신만고 끝에 경쟁력 있는 제품 개발에 성공해 막 상품화에 나설 참이었는데, 느닷없이 금융회사로부터 5억원에 연 5% 이자를 합한 금액을 반환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금융회사는 3년 동안 이익이 나지 않아 자본금이 쪼그라들고 있다는 이유를 댔다. 김 대표는 백방으로 뛰어다녀 다시 빚을 내 겨우 상환 자금을 마련했다. 김 대표는 "자금 대부분이 기자재 구입이나 연구개발에 투자된 터라 어쩔 수 없이 다른 데서 급전을 빌려야 했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최근 제품 개발을 완료했지만, 그사이 비슷한 제품이 시장에 나와 판로 개척에 애를 먹고 있다.

정부가 '창조금융'을 기치로 벤처기업에 대한 금융사들의 투자를 독려하고 있지만 시장의 반응은 떨떠름하다. 김씨 사례처럼 신생 벤처기업이 수익을 낼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 현재의 벤처금융 행태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는 벤처기업에 대한 명실상부한 금융 지원은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존 정부 벤처 지원금도 소진 안돼 남아돌아

창조금융은 새 정부 들어 이름만 바뀐 것일 뿐, 이전 정부들이 해 온 벤처금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는 이미 산업통상자원부, 기술보증기금, 콘텐츠진흥원 등 여러 유관기관들을 통해 14개에 이르는 정부 주관 펀드를 출범시켜 운영 중이다. 그런데 실적이 신통치 않다. 2009년 산업부가 내놓은 1조32억원 규모의 '신성장동력펀드'의 경우 지난 3월 말 기준 투자액이 5000억원에 미치지 못했다. 설립 4년이 다 되도록 자금의 절반도 쓰지 못한 것이다.

벤처업계는 이에 대해 창업기업 자본금의 'J'커브 효과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J커브 효과란 벤처기업의 재무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창업 초기엔 기자재 구입이나 연구개발 용도로 자본금을 사용하면서 자본금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이때는 비용만 들어가면서 수익을 전혀 내지 못한다. 그러다가 제품 개발에 성공하고 이익을 내면 이익금이 쌓이면서 자본금이 늘기 시작하고, 기업 경영이 본궤도에 오르면 창업 당시보다 자본금이 훨씬 커지게 된다. 기업 특허 담보 투자를 하는 아이디어브릿자산운용의 김홍일 대표는 "J커브 중 하락하는 모양의 앞부분이 얼마나 짧고 얕은지에 따라 창업기업의 성패가 결정된다"며 "이때가 기업들이 자금을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인데, 제대로 자금을 수혈받지 못해 엎어지는 곳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창업 3년 이하 벤처 투자 비중 30% 불과

실제 자본금 감소 단계에서 투자를 받는 기업들은 거의 없다. 벤처캐피털 업계에 따르면 2009~2012년 4년 동안 벤처캐피털 업체들의 창업 3년 이하 기업에 대한 투자 비중은 30%에 불과하다. 반면 창업 7년 이상 된 기업에 대한 투자 비율이 45%에 달한다. 벤처 투자가 아니라 중견기업 투자인 셈이다.

투자 방식을 보더라도 지분 투자보다는 대출 성격의 투자가 많다. 현재 벤처캐피털 업체들의 투자액 중 51.6%가 전환사채(CB) 같은 변종 지분 투자 형태를 띠고 있다. 금융사가 원하면 이자와 함께 투자원금을 회수할 수 있는 형태다.

이 같은 투자패턴 탓에 어렵게 개발한 기술이 대거 사장되고 있다. 산업기술연구회의 창업기업 대상 설문조사에 따르면 기술 개발에 성공하고도 사업화를 포기한 경우가 52.2%에 이른다.

창조금융을 활성화하기 위해선 'J'커브상의 초반 하락 국면에서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관련 업계는 투자 평가 체계 개선, 기술 심사 지원, 창업 초기 기업 투자 비중 확대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김홍일 대표는 "창업 초기 기업에 투자하면 회수할 때까지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1년 단위로 수익률 평가가 이뤄지다 보니 투자 담당자들이 소극적으로 임할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주관해 만든 펀드부터, 더 긴 안목의 성과 평가를 해야 담당자들이 마음껏 투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얼마나 투자할 가치가 있는 기업인지 파악할 수 있도록 정부가 특허청 등을 통해 기술 심사 등을 지원하고, 창업 초기 기업에 대한 투자가 활발해지도록 세제 등 지원을 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보완책 없이 투자금만 조성하는 것은 또 하나의 실패작을 낳는 꼴이 될 것이란 게 업계의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