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목동에 사는 주부 김모씨(54)는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 금융면과 산업면부터 살펴본다. 평생 신문과는 담쌓고 살았던 김씨가 신문을 꼼꼼히 살피게 된 것은 STX팬오션 때문이다.

김씨는 지난 3월 평소 알고 지내던 D증권사 직원의 권유로 STX팬오션 회사채에 2000만원을 투자했다. STX그룹에 대한 안 좋은 뉴스가 많았지만, D증권사 직원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STX팬오션을 인수할 텐데 뭐가 걱정이냐"며 투자를 권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직원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한 게 화근이 됐다. STX팬오션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이후로 김씨는 편하게 잔 적이 없다. 김씨는 "군대 가 있는 아들의 결혼자금을 고스란히 날릴 처지"라며 하소연했다.

국내 3대 해운업체인 STX팬오션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STX팬오션 회사채 투자자들의 손실이 불가피해졌다. 기업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회사채를 포함한 모든 채무는 동결된다. 기업 회생 계획안이 통과돼도 회사채 투자자는 투자금의 일부만 돌려받을 수 있다. 작년 9월 웅진홀딩스에 이어 1년도 지나지 않아 1조원대 회사채를 발행한 대기업이 또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회사채 투자자들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고금리·산업은행' 유혹에 넘어간 개인 투자자들

STX팬오션은 지난 7일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 법정관리 신청 당시 STX팬오션이 발행한 회사채 가운데 원리금을 상환하지 않은 회사채는 7건, 규모는 1조708억원에 이른다. 지난해 회사채 시장을 급랭시켰던 웅진홀딩스의 당시 회사채 잔액인 6500억원보다 4000억원 이상 많다.

금융 당국에 따르면 STX팬오션 회사채 가운데 60% 정도를 개인 투자자가 보유하고 있다. 웅진홀딩스나 대한해운처럼 과거 회사채 발행 후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문제가 된 경우에는 개인 투자자 비율이 50% 정도였다. STX팬오션 회사채에 개인 투자가 많았던 것은 산업은행이라는 '비빌 언덕'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STX팬오션 법정관리 신청 이후 증권사들이 STX팬오션 회사채를 불완전 판매(필요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고 투자하게 하는 것)했다는 제보가 제법 들어오고 있다"며 "주로 산업은행이 STX팬오션을 인수할 계획이기 때문에 걱정 없이 회사채를 사도 된다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많은 증권사가 산업은행이 STX팬오션을 인수할 것이라고 말하며 STX팬오션 회사채를 팔았다. 하지만 정작 증권사들은 STX팬오션 회사채를 보유하지 않았다. STX팬오션의 신용등급이 BBB+로 낮았기 때문에 기관투자가들도 STX팬오션 회사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대부분의 물량을 개인 투자자들이 떠안은 것이다.

한 증권사의 채권 담당 애널리스트는 "일부 증권사는 STX팬오션 회사채 판매를 위해 리서치센터에서 투자 부적격 등급의 회사채 투자에 관심을 가지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며 "주식시장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증권사들이 채권 판매에 열을 올리다 개인 투자자가 폭탄을 떠안은 셈"이라고 말했다.

고금리의 유혹도 무시할 수 없다. STX팬오션이 지난 3월 발행한 1000억원의 회사채는 금리가 연 6.7%였다. 저금리 시대에 지친 개인 투자자들의 투자금이 산업은행이라는 허상에 속아 STX팬오션으로 향한 것이다.

◇STX팬오션 회사채 투자금 많아야 20% 받을 듯

증권업계 관계자들은 STX팬오션 회사채 투자자들이 돌려받을 수 있는 돈이 많아야 20% 정도에 그칠 것으로 보고 있다. 개인 투자자가 투자금을 돌려받으려면 회생 계획안이 통과돼야 하는데, 보통 이 과정에서 회사채 투자자는 투자금의 20% 정도만 현금으로 받을 수 있다. 나머지는 출자 전환 주식으로 받는데, 출자 전환 주식은 기업이 정상적으로 살아나야 가치가 있다. 투자금의 20%를 현금으로 받고, 80%를 출자 전환 주식으로 받아다가 기업이 끝내 회생하지 못하면 80%의 출자 전환 주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STX팬오션은 지난 2011년 법정관리를 신청한 대한해운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대한해운이 법정관리 신청 전에 발행한 회사채는 3800억원 정도인데, 투자자가 돌려받은 현금은 10%에 그쳤다.

물론 회사채 투자자들이 다 절반 넘는 손실을 보는 것은 아니다. 웅진홀딩스는 회사채 투자자가 투자금의 70%를 현금으로 받았다. 하지만 웅진홀딩스는 우량 계열사인 웅진코웨이가 있었기 때문에 STX팬오션과 상황이 다르다. STX팬오션은 올해 3월 말 기준으로 현금성 자산이 762억원에 불과하다.

◇법정관리는 회사채 투자자 악몽

기업이 법정관리를 악용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법정관리는 미국의 관리인 유지(DIP·debtor in possession) 원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법정관리를 받는 기업의 대주주나 경영진이 경영권을 인정받는 경우가 많다. 반면 채권단 자율 협약이나 워크아웃은 채권단이 기업 운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에 대주주가 경영권을 유지하기 어렵다. 기업 입장에선 자율 협약이나 워크아웃보다 법정관리를 선호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문제는 법정관리에서 회사채 개인 투자자들의 손실이 커진다는 점이다. 자율 협약이나 워크아웃은 금융기관이 보유한 채권만 동결되지만, 법정관리에선 개인 투자자가 투자한 회사채까지도 모두 동결되기 때문에 개인 투자자의 손실이 생긴다. 기업의 이익과 개인 투자자의 이익이 상충되는 것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이해당사자인 기업이 선택권을 쥐고 있는데, 당연히 자신들에게 유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법정관리 신청 기업은 2006년 76곳에서 2011년에는 712곳으로 늘었다.

김성용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국과 비슷한 법정관리 제도를 운영하는 미국에서는 법정관리 신청 기업 경영진의 절반 정도가 교체된다"며 "한국 법원은 기존 경영진을 무조건 유지시키기보다는 책임을 강하게 물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