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 31일 원전 3기(基) 가동 중단으로 인한 전력난 해소를 위해 8월(5~30일) 5000kw 이상 전기를 사용하는 건물에 대해 3~15% 강제 절전을 한다고 발표하자 "공장을 세우라는 거냐"며 기업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지난겨울 대기업에 대해 전기 사용을 최대 10%까지 줄이는 강제 절전 지침을 내린 정부는 올여름에는 절전 최대치를 15%까지 늘린 것이다.
2일 본지 취재 결과 삼성전자·LG전자 등 국내 핵심 제조 기업들은 "그동안 해온 것을 감안했을 때 올 8월에 전월보다 5% 이상 전력 사용량을 감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잠정 결론 낸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가 밀어붙일 경우 24시간 가동해야 하는 라인을 제외하곤 올 8월엔 공장 가동을 하지 말라는 얘기라는 것이다. 현대제철은 "업종별 정부 지침이 나와야 알겠지만 최대 15%까지 줄이려면 8월 한 달간 정상치 생산량의 절반만 생산해야 한다"고 밝혔다.
◇"할 만큼 해 더 이상 절전하기 힘들다"
전기로 고철을 녹여 쇳물을 만드는 전기로(電氣爐)를 갖고 있는 현대제철은 산업부 발표대로 최대 15% 절전을 이행하려면 정부안대로 하루 4시간(오전 10~11시, 오후 2~5시) 전기로 가동을 중단해야 하는데, 제조 속성 때문에 가동 중단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회사 관계자는 "대규모 장치산업이기 때문에 방 안의 형광등 스위치를 끄듯 전기량을 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고 말했다. 가동을 중단하는 데만 2시간, 재가동하는 데도 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두 차례에 걸쳐 4시간 가동 중단을 하려면 11시간 공장 가동을 줄여야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24시간 정상 가동할 때보다 생산량을 46% 줄여야 한다. SK증권은 "현대제철이 만약 공장을 세우지 않고 피크타임 때 공장을 가동한다면 연간 900억원(7500억→8360억원) 정도 전력요금을 더 내야 한다"고 추산했다. 작년보다 12% 늘어난 수치다.
LG전자는 지난겨울 전력 수급 비상사태를 맞아 5%까지 전력 소비를 줄였다. 공장 내부 등을 끄고, 난방기 가동을 완전히 멈추는 등 생산과 관계없는 설비 가동을 중단한 결과였다. 삼성전자도 지난해 이런 식의 전기 사용 통제를 통해 가전 부문 7%, 반도체 부문 3% 등 평균 4.5% 전력 사용량을 줄였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우리가 한 최대치가 4.5%였다"면서 "그 이상 줄이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반도체·화학 등은 24시간 돌려야 한다. 따라서 사무동 냉방기를 완전히 끄는 것 외에 공장에서 전력 사용량을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강제 절전에는 비상발전기도 무용지물이다. 주요 공장별 비상발전기는 정전이 났을 때 사용하는 것이지 절전을 위해 한전에서 공급하는 전력선과 함께 사용할 수 없다. 현대기아차에서 자가발전기와 한전 전력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곳은 남양연구소와 광주 공장뿐이다.
고심 끝에 냉방기를 아예 끄겠다고 나서는 기업도 나타나는 등 기업 대응도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다.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더라도 정부가 할당한 절전 목표치를 채우기 위한 고육책이다. 현대중공업은 오전 11~12시, 오후 2~5시 사업장 내 모든 냉방기기 가동을 중단키로 했다. STX조선해양은 사업장 내 본부별로 전력 사용량의 절약 기준을 정한 뒤 그 실적에 따라 연말 성과에 반영하기로 했다. 공작기계와 자동차 부품 등을 생산하는 현대위아는 공장 천장에 창을 설치해 자연 채광 시스템을 도입해서 조금이라도 전력 사용을 줄이려 한다.
◇결국 휴가기간 옮기거나 생산하지 말라는 얘기
정부의 강제 절전 대책은 국가산업 경쟁력 악화로 이어진다는 우려도 상존한다. 10대 그룹에 드는 한 제조업체 전무는 "결국 공장 가동을 멈추는 휴가를 기존 7월 말에서 8월 초~8월 둘째 주 이후로 돌리거나 전기를 많이 쓰는 핵심라인을 낮에서 밤으로 변경시키는 등 지금까지 쌓아온 생산 공정 노하우에 중대한 변화를 가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대한상의 박종갑 상무는 "정부에서는 상황에 몰려 산업계 절전을 강요하지만 외국에선 한국 산업 경쟁력이 나빠지고 곪아가는 징후 중 하나로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