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세계를 그린 영화 ‘매트릭스’.

뇌 질환에 걸리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세 중 하나가 길을 잃는 것이다. 또 한 번 가본 길은 언제라도 기억하는 길눈 밝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사를 한 지 1주일이 지나도 이 골목이 저 골목 같다고 하는 '길치'도 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뇌 안에 들어 있는 내비게이션에 있을지 모른다. 과학자들이 뇌에 내장된 내비게이션 시스템의 비밀을 잇달아 밝혀내고 있다.

가상현실에선 뇌 내비게이션 불통

대표적인 뇌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1970년대 영국 런던대(UCL)의 존 오키프 교수가 처음 밝혀낸 '장소 세포(place cell)'다. 뇌에서 공간인지와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에 있다. 장소 세포는 특정 위치에서만 작동한다. 이를테면 출근길에 집을 나온 뒤 다섯 걸음을 걸어 장미 나무를 만나면 그에 맞는 장소 세포가 전기신호를 낸다. 퇴근길에 집 앞에 있는 같은 장미 나무를 만나면 똑같은 장소 세포가 다시 작동한다. 집을 오가는 길에 가로등 같은 다른 사물을 만나면 다른 장소 세포가 작동한다. 뇌가 길에서 마주치는 사물이나 특정 위치마다 서로 다른 표시를 하는 셈이다.

장소 세포가 작동하려면 특정 위치를 기억할 만한 단서가 있어야 한다. 가장 먼저 눈으로 본 장미 나무나 가로등을 떠올릴 수 있다. 과학자들은 사람의 걸음걸이나 속도와 같은 동작 단서도 장소 세포에 유용한 정보가 된다고 본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의 마얀크 메타 교수팀은 '사이언스' 최신호에 냄새나 소음, 촉감 같은 주변 정보도 장소 세포에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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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진은 볼 마우스 위에 생쥐를 매달아 두고 눈앞에 가상현실 화면을 보여줬다. 생쥐가 볼 마우스 위를 움직이면 그에 따라 화면이 바뀌었다. 나중엔 가상현실 화면과 똑같은 실제 장소를 생쥐가 오가게 했다. 가상현실과 현실세계는 시각 정보나 생쥐의 동작 정보에서는 차이가 없다. 다만 가상현실에서는 생쥐의 발에 닿는 촉감, 장소마다 다른 소음 같은 주변 정보가 없다. 생쥐의 뇌에서 나오는 전기신호를 비교했더니 가상현실에서는 장소 세포의 활동이 실제보다 절반으로 떨어졌다.

심지어 장소 세포가 오작동을 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현실에서 현관을 나서 다섯 걸음 걸었을 때 작동한 장소 세포는 퇴근 때 현관 앞에서 다섯 걸음 떨어진 위치에서 똑같이 작동한다. 반면 가상현실 화면을 본 생쥐에서는 현관 앞 다섯 걸음에서 작동한 장소 세포가 퇴근할 때 집이 아니라 회사 앞 다섯 걸음에서 작동했다. 집과 회사 앞을 착각한 것인데, 가상현실에선 절대적 위치가 아니라 상대적 위치만 기억했다는 뜻이다. 영화 '매트릭스'에 들어간 사람들은 당장 길치가 된다는 말이다.

뇌에 들어 있는 위도와 경도

내비게이션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특정 위치를 파악하는 것뿐 아니라 전체 공간에서 현재 위치가 어디쯤인지도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지도에서 위도와 경도를 통해 위치를 찾는 것과 마찬가지다. 뇌에도 같은 역할을 하는 세포가 있다. 바로 '격자 세포(grid cell)'이다. 2005년 노르웨이 과학기술대의 모제르 교수 부부는 '네이처'에 생쥐의 뇌가 공간을 일정한 간격으로 나눠 파악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진은 생쥐가 상자 안에서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오갈 때 뇌 신호를 분석했다. 그러자 해마 바로 옆 내후각피질에 있는 신경세포가 일정한 거리마다 집단적으로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평면에 표시했더니 상하좌우로 거리가 일정한 격자들이 만들어졌다. 뇌 지도에 위도와 경도선을 그린 셈이다. 생쥐가 상자를 상하좌우로 일정한 간격으로 나눈 특정 지점을 지날 때만 격자 세포가 작동했다. 다시 말해 생쥐가 상자를 멋대로 왔다갔다한 것 같지만 자기가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지난해 미국 에모리대 국립영장류연구센터 연구진은 '네이처'에 사람과 같은 영장류인 원숭이에서도 격자 세포가 작동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장소 세포와 격자 세포의 연결 고리는 아직 열리지 않은 블랙박스로 남아 있다. 이창준 KIST 신경과학연구단장은 "격자 세포는 정해진 경로를 갈 때 얼마쯤 왔는지 알려준다"며 "장소 세포와도 서로 신호를 주고받을 것으로 추정되나 어떤 관계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알츠하이머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생기면 가장 먼저 장소 세포와 격자 세포가 있는 곳이 손상을 입는 것으로 알려졌다. 뇌 내비게이션 연구는 뇌 질환을 일찍 찾아내고 치료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