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공에서 바라본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의 모습. 십자가(十)형태다.

“영국왕립 건축협회 소속 아더 딕슨이 설계하여 1927년 미완성형태로 건립됐다가 1998년에 다시 재건축됐다.”

광화문 대한성공회 대성당 중앙 전면부 앞에 있는 건물의 역사를 기술한 관광 안내문이다. 아더 딕슨은 누구이며, 70년 만에 완성된 사연은 또 무엇일까.

1889년 11월 1일, 영국의 켄터베리 대주교 벤슨이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존 코프(C. John Corfe)를 주한 주교로 임명했다. 코프 주교는 두 명의 영국 의사와 옥스퍼드 대학 출신인 트롤로프 신부와 워너 신부, 인쇄기술자 등으로 구성된 선교단을 이끌고, 1890년 9월 29일 국내에 상륙했다.

존 코프 주교는 정동 4번지 현재 영국공사관이 자리에 있는 한옥에 살며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1892년에 들어선 코프 주교가 정동에 세운 교회는 ‘장림성당’(The Church of Advent)이라고 불렸다.

‘장림’은 기독교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일컫는 말이다. 장림절 또는 강림절은 크리스마스 전 넷째 주 일요일을 대림절 제1주일로 하는, 크리스마스까지의 준비 기간을 말한다.

1909년 부지를 사 교회 부지를 확정하고, 1912년부터 교회 건립을 위한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성당 건립은 서울 대성당 제3대 마크 트롤로프(M.N. Trollope) 주교가 주도했다. 토롤로프 주교는 어느 정도 자금을 모은 뒤, 버밍햄 지역의 유명 건축가인 아더 딕슨(Arthur Dixon)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1917년 설계를 시작해 1922년 착공에 돌입했다.

그러나 대한성공회 대성당은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원 설계도인 ‘큰 십자형’ 모양을 완성하지 못하고 양쪽 날개와 아래쪽 일부를 뺀 ‘작은 일자형’으로 공사가 마무리됐다. 미완성인 상태로 성당은 1926년 헌당(獻堂)된다. 이후 대한성공회 성당은 미완성된 건물을 70년 동안 사용했다.

성당 재공사는 창립 100년을 앞두고 1991년 결정됐다. 그러나 당시 원 설계도가 유실돼 공사는 바로 시작되지 못했다. 뜻밖에도 한 영국 관광객이 자신이 근무하는 영국 렉싱턴 지역 도서관에 아더 딕슨의 원 설계도가 보관돼 있다고 성공회 측에 전하면서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대한 성공회 성당 재건 당시 설계도

당시 재공사를 맡았던 김원 광장 건축대표는 이 단서를 바탕으로 1993년 영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건축가에게 부탁해 영국 렉싱턴 도서관에서 원 설계도를 찾는 데 성공했다. 그는 영국으로 가 복사비만 지불하고 원 설계도를 복사해서 국내로 가져왔다. 대한성공회는 1994년 한국 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으로 증축 공사를 시작했다. 1996년 현재의 모습으로 공사를 마치게 된다.

1840년대부터 1900년 초까지 새로 건축된 영국 교회 건물은 대부분 하늘에 닿고자 하는 신앙심을 표현한 뾰족한 첨탑 느낌의 네오 고딕양식이었다. 초기 한국에 온 영국 선교사 모두가 그랬듯 트롤로프 주교도 옥스퍼드 운동의 영향을 받아 서울주교좌교회를 고딕풍으로 건축하고자 했다.

하지만 설계를 맡았던 아더 딕슨은 1910년 초 영국에 네오 고딕(Neo-Gothic) 운동이 사라지고 비잔틴 로마네스크 바람이 불고 있을 때 비잔틴 연구에 합류했던 사람이었다. 결국 트롤로프 주교는 딕슨과 상의 끝에 제단을 비잔틴 풍, 외향은 로마네스크 풍으로 대한성공회 대성당을 건축하는데 합의했다.

성공회 대성당을 그 규모와 외양에서 천주교 명동성당과 비견된다. 전문가들은 모양새 덕분에 ‘뾰족집’이란 별명을 얻었던 명동성당을 “순수한 고딕식 구조로 첨탑으로 상징되는 수직의 힘이 강하게 느껴진다”고 평했고, “성공회대성당은 둥근 원형의 아치가 건물 전체에 너울지면서 사람을 평안하게 품으면서 낮은 곳으로 향하려는 그리스도 정신을 담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