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 탈출이란 목표를 향해 속도감 있게 엔저(低)와 양적완화를 밀어붙이는 일본의 아베 정부와 달리, 25일로 출범 두 달째를 맞은 박근혜 정부는 경제정책에 관한 한 '슬로 모션'이다. 지난 두 달간 발표된 주요 대책은 추가경정예산 19조3000억원 편성과 4·1 부동산 종합 대책 정도다. 야당의 반대로 정부조직법 통과가 지연되면서 정부 출범 자체가 늦어진 영향이 크다. 또 대선 공약을 다 지킨다는 대통령의 뜻에 따라 모든 공약을 로드맵(roadmap·일정표)으로 전환하는 작업이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되면서 속도가 붙지 못하고 있다. 창조경제는 5월, 투자 활성화 방안은 5월 중순, 큰 그림(로드맵)이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국회에 제출된 추경예산안도 "민생을 살린다는 본래 목적과 동떨어진 예산 배정"이란 야당의 반대에 부딪혀 다음 달에나 국회를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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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구(전 산업자원부 장관) 니어재단 이사장은 "박근혜 정부가 아베 정부처럼 국민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러다간 로드맵 105개를 세우다 취임 첫해를 허송세월한 노무현 정부의 재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엇갈리는 메시지, 교통정리 안 돼

정부와 중앙은행이 한목소리를 내는 일본과 달리 박근혜 정부는 부처마다 엇갈린 메시지를 내며 시장의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기업에 대한 정부의 메시지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5일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기업들이 보유 현금 52조원의 10%만 투자해도 추경에 버금가는 경기 활성화 효과를 볼 수 있다"며 기업 투자를 독려했다. 하지만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는 세무조사와 불공정 행위 조사로 기업을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다. 국세청은 지하경제 양성화를 명분으로 저인망식 세무조사에 나서 기업의 원성을 듣고 있다. 한이헌 전 경제수석은 "중견 규모 이상의 기업 중 국세청의 세무조사나 공정위 조사 안 받는 곳이 없을 정도다. 암환자를 치료하면서 전신에 방사선을 쏘는 격"이라며 "암세포(대기업의 불공정한 행위)뿐 아니라 정상 세포(기업들의 투자)까지 다 죽이고 있다"고 말했다.

정책 수요자인 기업들 입장에선 경제 활성화가 우선인지, 경제 민주화로 대표되는 거래 관행 개선이 우선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니 박근혜 대통령이 "피부에 와 닿게 네거티브 방식으로 확실하게 규제를 풀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말해도 기업들이 움직이기 힘들 수밖에 없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은 "대통령은 기업들의 투자를 독려하는데, 국세청과 공정위는 연일 기업 때리기에 나서고 있다"면서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참 답답하다"고 말했다.

◇"로드맵 만들다 날 새운 노무현 정부 꼴 날라" 우려

정부가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국정 과제 전반을 아우르는 우선순위나 실행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2월 말 '박근혜 정부 국정 과제'를 공개했지만, 이 자료만 봐서는 어떤 과제가 우선이고 어떤 부처가 분야별 과제를 총괄할지 명확하지 않다. 부처마다 '창조'를 들먹이지만 컨트롤타워가 안 보이고, 공정위·금융위·기재부가 경제 민주화를 말하지만 실행 범위는 아직도 모호하다. 정부는 뒤늦게 국정 과제별로 실행 방안을 마련 중이지만, 이마저도 속도가 늦다.

코스피 소폭 상승, 해갈에는 역부족 - 한국 주식시장은 엔저로 인한 수출 업체의 실적 부진 등으로 맥을 못 추고 있다. 24일 코스피지수는 전날보다 소폭 오른 1935.31로 거래를 마쳤다. 코스피 지수는 올 들어 3.1% 하락한 상태다.

전문가들은 공약 도그마에 빠진 박근혜 정부의 지금 모습이 10년 전 노무현 정부와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박근혜 정부가 140개 국정 과제에 대해 추진하고 있는 로드맵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원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공약을 실행하기 위해 부처별로 정책 목표와 추진 일정을 담은 로드맵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재정·세제 개혁 로드맵, 시장 개혁 로드맵, 노사 관계 로드맵 등 105개가 쏟아져 나왔다.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새 정부가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무리한 공약을 모두 지키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꼭 필요한 과제에 매달려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