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국내 기업들의 주총 시즌에선 '신사업'이란 단어가 사라졌다. 투자 열기가 차갑게 식어버린 것이다. 과거 기업들은 주총에서 정관 개정을 통해 신규 사업 진출을 떠들썩하게 알려왔다. 신사업 찾아보기가 힘들자 기업 현장에선 "성장동력까지 잃는 것 아닌가" 탄식까지 나온다.

24일 본지가 거래소, 코스닥에 상장된 삼성·현대자동차그룹 등 10대 그룹 계열사 83개의 신규사업 진출 정관 변경을 조사한 결과, 올해 신사업을 추가하는 곳은 에스원의 신재생에너지 사업 등 7개에 불과했다.

이 중 포스코엠텍(도시광산업), 에스원 두 곳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신사업이라고 말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초라한 분야다. 현대차·SK텔레콤·제일모직이 각각 추가한 엔진소재 연구, 기계설비공사, 화장품 제조 판매 사업도 기존 사업의 부대사업 정도에 그치는 것이다.

◇과거엔 자원개발·신소재 사업 봇물

예전에는 주총 시즌이면 바이오 의약·OLED(유기발광다이오드)·연료전지·신재생에너지 등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신사업이 등장했다. 작년과 재작년엔 10대 그룹 계열사 중 각각 16개, 19개 기업이 신소재·자원개발·친환경 등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기업들은 "글로벌 경기 침체 장기화에 대비해 공격적으로 사업 영역을 다각화하겠다"고 말했다.

작년의 경우 현대모비스(전기차 배터리 등 친환경 에너지), 현대하이스코(건물용 연료전지), SKC&C(전자금융결제), LG화학(OLED 조명 사업), 삼성테크윈(에너지 진단·서비스업 등), 한화케미칼(바이오의약사업), 현대종합상사(의료서비스업, 수처리) 등이 신사업에 뛰어들었다.

재작년엔 에너지 자원 개발이 많았다. 현대차는 '희토류 등 국내외 자원개발판매업'을 정관에 새로 포함했다. 삼성물산이 의료용품과 의료기기 제조·판매, 담수·상하수도 설비 등 4가지 신사업을 한꺼번에 추진했다. LG전자는 에너지컨설팅 사업과 환경오염 방지 시설업 등을 추가했다.

올해 신사업 진출이 저조한 것은 국내 정치 리스크(위기)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공정위 등 정부 각 기관에서 문어발 확장 여부를 따지겠다고 벼르고 있어 신사업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다"고 말했다. 작년 경기가 워낙 좋지 않아 기업마다 현상유지 정책을 펴는 곳이 많아진 것도 또 다른 이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예 축소 지향적으로 사업군을 재편성하는 곳도 있다. SK그룹의 종합상사 계열사인 SK네트웍스는 지난 22일 열린 주총에서 항공기부품제조·의약품수출입 등 15개 사업을 접겠다고 정관을 개정했다. 삭제하는 업종은 지난 몇 년간 신규 사업으로 지정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는 것들이다. 회사 측은 "앞으로 성공 가능성이 낮은 사업군에 대한 정비 차원"이라고 했다.

올 주총 시즌에서 신사업을 위한 정관 개정이 거의 사라졌다. 사진은 서울 양재동 본사에서 열린 현대차 주총 모습.

◇"이대로 두면 악성암(癌) 될 수도"

골목 상권까지 노리는 대기업의 신규 사업 진출은 막아야 한다. 하지만 세계시장을 겨냥한 수출 사업을 찾는 것이 부진하다는 점에서 한국 경제의 위기라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2000년대 초중반까지 완성한 반도체·철강·석유화학·조선·자동차 산업에 대한 투자가 일단락되고 더는 새 성장 산업이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초조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은 "현재 우리 경제 체제가 신사업 진출을 통한 과감한 변신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아니다"며 "이대로 놔두면 한국 경제의 새로운 악성암으로 발전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