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개발에는 10년 넘는 시간과 수천억원 이상의 경비가 들어간다. 그런데도 성공률은 20%가 못 된다. 당연히 제약사들은 엄청난 매출이 예상되는 환자가 많은 질병의 치료제에 집중한다. 그래야 실패한 투자까지 보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녹십자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회사가 지난해 1월 식품의약품안전청의 허가를 받은 '헌터라제'는 국내 환자가 70여명에 불과한 희귀병인 헌터증후군 치료제다. 녹십자 종합연구소 소장인 박두홍 전무는 "환자가 많은 질병을 대상으로 엄청난 매출을 올리는 '블록버스터(blockbuster)'가 아닌 경쟁자가 거의 없는 틈새(niche) 시장을 노리는 '니치버스터(nichebuster)' 개발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헌터증후군은 세포에서 특정 효소 단백질을 만들지 못해 정신지체와 운동성 저하 등의 증세를 보이는 유전질환이다. 심한 경우 15세 전후에 사망한다. 남아(男兒) 10만~15만명에 1명꼴로 발생해 전 세계 환자가 2000여명에 불과하다. 미국은 환자가 20만명 이하인 질병 치료제를 '희귀의약품(orphan drug)'으로 지정해 제약사에 여러 혜택을 주고 있다. 말 그대로 제약사가 돈이 안 된다고 버린 '고아' 약품이어서 정부가 지원하는 것이다.

녹십자 종합연구소장 박두홍(맨 왼쪽)전무와 헌터라제 개발진들. 박 전무는 “헌터라제 개발은 경쟁자가 거의 없는 시장을 노리는 새로운 전략”이라고 말했다.

시장은 작지만 경쟁자가 없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헌터증후군 치료제는 전 세계적으로 영국 샤이어(Shire)사가 개발해서 출시한 '엘라프라제'가 유일했다. 이 약은 2006년 출시 첫해에 2400만달러(약 260억원) 매출에서 매년 11%씩 매출이 증가해 2011년에는 5억달러(5400억원)로 늘었다. 전문가들은 곧 1조원 매출을 돌파할 것으로 예측한다. 녹십자 목표대로 이 시장을 양분하면 바로 매출 5000억원대 '틈새시장 블록버스터'가 탄생하는 것이다. 헌터라제는 이미 세계보건기구(WHO)와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희귀의약품 인증을 받았다. 회사는 올해 안에 미 FDA에 임상시험 승인 신청을 할 계획이다.

희귀 의약품은 새로운 블록버스터로도 이어질 수 있다. 인체의 생명 현상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희귀병의 원인을 치료하는 길을 찾으면 다른 질병 치료에도 적용할 수 있다. 특히 희귀병 치료제는 환자가 적어 임상시험 시간이 짧다. 일단 승인 받은 치료제의 효능을 추가하는 것은 신약 개발보다 훨씬 쉽다. 실제로 얀센의 '레미케이드'도 처음엔 희귀병인 고셔병 치료제로 출시됐다가 나중에 류머티즘 관절염, 궤양성 대장염 등으로 발전해 현재 85억달러(9조21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헌터라제 개발은 국내 헌터증후군 최고 권위자인 삼성의료원 진동규 교수가 "우리 기술로 더 좋은 약을 만들면 기존 치료제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할 때를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박두홍 전무는 "헌터라제 개발은 산학협력의 모범적인 모델"이라고 말했다. 헌터증후군 치료제는 환자에게 없는 효소 단백질 생산 유전자를 동물세포에 넣어 배양해 만든다. 지식경제부는 2002년부터 5년간 국내 벤처기업들에 연구비를 지원해 인체 유전자를 넣은 세포와 실험실 단위의 배양공정 기술이 개발됐다. 녹십자는 이 기술을 이전받아 대량생산 공정을 개발하고 동물실험을 거쳐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임상시험은 최소 30명의 환자가 참여해야 한다. 다행히 국내 70여명의 헌터증후군 환자 중 조건에 맞는 환자가 31명이었다. 이 환자들이 모두 임상시험에 참여했다. 보건복지부는 3년 동안 임상시험 경비를 지원했다. 박 전무는 "기술 도입 3년 11개월 만에 제품 승인을 받은 것은 병원과 벤처기업, 정부, 대형 제약사의 완벽한 협력체제 덕분"이라고 말했다.

녹십자는 새로운 니치버스터를 준비 중이다. 12만명당 1명꼴로 나타나는 유전질환인 파브리병 치료제가 그것. 국내 환자는 60여명. 지난해 3월 임상1상시험 승인을 받았다. 희귀 질환은 7000여개에 이르지만, 치료제는 이 중 200여개만 개발된 상태다. 박 전무는 "세계적인 제약사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으나 임상시험 후반기에 제품을 도입하거나 벤처회사를 합병하는 형태에 그치고 있다"며 "한국 제약사들이 개발 초기 단계부터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분야"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