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북미국제오토쇼’에서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크라이슬러-피아트그룹 회장은 작심한듯 한·EU FTA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유럽자동차공업협회(ACEA) 회장이기도 한 그는 “유럽 자동차 시장이 5년 연속 침체를 겪고 있는데 한·EU FTA까지 발효되면서 자동차 시장 경쟁이 더욱 격화되고 있다”며 “나는 한·EU FTA에 서명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한·EU FTA를 지지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한·EU FTA에 불만을 가진 글로벌 자동차 업계 리더는 마르치오네 회장 뿐만이 아니다. 그레고아 올리비에 푸조·시트로엥그룹(PSA) 부회장 역시 지난달 방한한 자리에서 “한·EU FTA는 결코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도 “유럽 차량이 한국으로 수입될 때 절차들 중에서 정리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고 본다”며 한·EU FTA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도요타 대량 리콜 사태 당시 비난 여론은 미국내에서 일본차들의 점유율이 높아진데 따른 반작용이라는 분석이 대세다. 미국 자동차 산업 근로자들이 2010년 재미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하고 있는 모습. 그들은 도요타가 미국 내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고 주장했다.


◆ 입만 열면 한국 견제 "현대·기아차 때문"

자동차 업계 리더들의 이 같은 발언은 한·EU FTA 이후 유럽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고 있는 현대·기아자동차에 대한 '견제구'다. ACEA에 따르면 지난해 유럽 시장에서 현대차는 전년 대비 9.4% 증가한 43만2240대, 기아차는 1년 전보다 14.6% 늘어난 33만7466대의 자동차를 판매했다.

두 브랜드의 판매량을 합치면 총 76만9706대로, 시장점유율은 사상 처음으로 6%를 넘어선 6.2%에 달했다. 특히 현대·기아차는 재규어랜드로버와 함께 판매량이 증가한 2개 브랜드 중 하나로 꼽혔다.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크라이슬러-피아트 그룹 회장이 지난달 15일(현지시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북미국제오토쇼'에서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마르치오네 회장은 대표적인 한-EU FTA 반대론자다.

유럽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는 현대·기아차와 달리 유럽 자동차 시장 자체는 침체 일로를 걷고 있다. 지난해 EU 27개국에 등록된 신차는 총 1200만여대로, 전년 대비 8% 감소했다. 12월 기록으로는 2011년과 비교하면 1년 만에 16% 감소하며 2008년 이후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다.

이처럼 유럽 내 판매 실적이 부진하자 PSA는 2014년 오네 공장을 폐쇄할 예정으로, 정부가 ‘뱅크 PSA’에 50억~70억유로 규모의 지급보증을 설 정도로 사정이 좋지 않다. 포드 역시 올해 영국 사우스햄프턴 공장을 폐쇄할 계획이며, 2014년까지 유럽 내 3개 공장 폐쇄로 총인원의 13%를 감원한다는 목표다. 오펠은 올해 유럽지역 생산 목표를 지난해 대비 10% 감소한 84만5000대로 설정했다.

전문가들도 유럽 시장이 단기간에 회생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유럽 자동차 시장이 2.2%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추락하는 시장에서 현대·기아차가 나홀로 호황을 누리다 보니 유럽 자동차 업계로서는 배가 아플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의 한 도요타 자동차 딜러가 차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다. 2009년 리콜사태 직후 도요타 판매량이 격감했다.


◆ 비난 여론몰이, 도요타 사태 전개 방식과 유사

문제는 한국 자동차에 대한 이 같은 여론 몰이가 2009년 도요타 리콜사태와 같은 대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이다.

비록 급발진 사고라는 결정적 계기가 있기는 했지만,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자동차 사장을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머리 숙이게 만든 건 미국 내 여론이었다.

급발진 사고가 발생하자 미국 언론은 대대적으로 도요타 자동차의 결함에 대해 보도했다. 미 의회와 대통령도 도요타 자동차의 안전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정도였다. 한 방송사는 아키오 사장이 사과 성명을 발표하면서 허리를 90도가 아닌 45도 정도만 굽혔다며 사과의 진정성을 검증하기도 했다. 필요 이상의 ‘비난을 위한 비난’도 적지 않았던 셈이다.

드높은 비난 여론은 결과적으로 미국 하원에 이어 상원도 ‘도요타 청문회’를 개최하는 원인이 됐다. 도요타는 2010년 1월 8개 차종의 판매를 중단했고, 다음달 판매량은 1년 만에 8.7% 감소했다.

미국 정부와 여론의 일본 자동차 견제의 역사는 19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은 1980년대 이후 일본 자동차 수입이 급격히 늘자 수출자율규제·구조조정협의 등 무역장벽을 세워 일본 자동차 업체들의 공세를 막아왔다.

그러나 도요타·혼다·닛산 등 일본 업체들이 미국 내 현지 공장 건설을 통해 이 같은 방해 공작을 무력화시키면서 2000년 이후 제너럴모터스(GM)·포드·크라이슬러 등 소위 ‘빅3’ 업체들이 고사 직전에 이르렀다.

토종 자동차 업체들의 부활을 모색했던 미국 여론과 정부로서는 도요타의 급발진 사고가 시장점유율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최고의 호재였던 셈이다.

◆ "제 2의 도요타 사태 부를라"

날로 높아지고 있는 현대·기아차의 해외 시장 점유율 역시 미국·유럽 등 선진국들의 자국시장 보호 욕구를 자극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현대차에 대한 세계 각국의 견제는 현실화 되고 있다.

지난해 8월 프랑스 정부는 FTA 이후 유럽 자동차 업체들이 공장 폐쇄 등 피해를 입고 있다고 주장하며 EU에 현대·기아차를 우선 감시 대상에 포함시켜줄 것을 요구한 바 있다.

현대기아차의 늘어난 시장점유율은 해외 주요 국가들의 자국산업 보호 심리를 자극할 수 있다. 지난해 스위스 제네바모터쇼에 참석한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왼쪽)이 자동차 전문지‘인터오토뉴스’의 토마시 대표로부터‘2011년 글로벌 최고 경영인상’을 수상하고 있는 모습.

2개월 뒤 EU 집행위원회가 프랑스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이 같은 사태는 일단락 됐지만 언제 다시 현대·기아차에 대한 견제 조치가 내려질 지 알 수 없는 상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해 주례 라디오 연설에서 “한국과 같은 외국 도로에 디트로이트(미시간주)와 털리도(오하이오주), 시카고(일리노이주)에서 수입한 자동차가 더 많이 보이기를 원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현대·기아차가 미국 시장점유율을 높이자 반대로 한국 안방 시장을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작년 연말 벌어진 현대·기아차의 연비 과장 논란 역시 한국 자동차 산업에 대한 견제 심리 탓에 더욱 증폭됐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 벌어질 수 있는 자동차 부문 통상 마찰에 더욱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도요타는 1980년대 이후 미국의 자동차 산업에 대한 무역 장벽이 높아지자 정가가 모인 워싱턴에 대규모 로비스트를 고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5년간 동원된 로비스트만 31명, 로비 금액은 총 2500만달러, 우리돈 271억원에 달한다.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과 교수는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 업체들은 워싱턴을 통한 대관 업무에는 소홀한 것 같다“며 ”1980~1990년대 일본 자동차 산업에 가해진 무역 규제들을 심도 있게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