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후 1시 지하철 분당선 압구정로데오역. 지하철 5번 출구를 나오자 바로 건너편 상가들에 ‘임대’라고 붙여진 빈 건물들이 눈에 띈다. 점심 시간대였지만 오가는 사람이 드물어 성수기가 끝난 해수욕장처럼 한산하다. 골목을 돌아 로데오길 주변 중심거리에 들어서도 한적하긴 마찬가지. 거리에는 중국인 관광객들을 위해 한자로 쓰인 호객 현수막만 바람에 나부꼈다.

작년 10월 개통된 분당선역 5번출구. 도로 건너편 주요 상가에 '임대'라고 붙어있는 건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비슷한 시간 1.5Km 남짓 떨어진 신사동 가로수길. 빈틈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빼곡히 들어선 건물마다 CJ계열의 드럭스토어 올리브영부터 스페인 계열 SPA(유행에 맞게 제품 생산·판매·유통을 빠르게 한 패션) 브랜드인 ZARA, 커피전문점 스타벅스 등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는 대형 브랜드 업체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들어서 있다. 창 넘어 보이는 식당과 커피숍, 의류매장에는 점심을 마친 시간이었지만 적잖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앞을 가로지르는 논현로를 사이에 두고 강남 신구(新舊) 상권을 대표하는 가로수 상권과 압구정 상권의 명암이 엇갈리고 있다. 1990년대 패션과 소비를 이끌었던 압구정 로데오 거리의 쇠퇴와, 최근 새로운 소비 트렌드의 진원지로 떠오르는 가로수 상권의 번창이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13일 밤 신사동 가로수길. 작은 도로 위로 사람이 가득하다

◆ 대기업 격전장 된 가로수길…고래 싸움에 새우들은 세로수길로

기업은행 신사동지점에서부터 신사동 주민센터까지 남북으로 700m 정도 길이인 가로수길은 5~6년 전부터 젊은 층의 발길이 모이는 유행의 첨단 거리로 인기를 끌고 있다.

가로수길은 최근 SPA 브랜드들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그간 강남·홍대 일대에 적당한 자리를 찾지 못했던 브랜드들이 가로수 길로 속속들이 몰려든 것. 작년 초부터 제일모직의 에잇세컨즈를 비롯해 미국계 FOREVER 21 등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ZARA와 경쟁사인 H&M 등도 가로수 일대를 메우고 있다. 대형 업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들다 보니 이 일대 상가 권리금과 임대료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인근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전용면적 66㎡(20평) 기준 가로수길의 점포 월 임대료는 800만~1000만원 선으로 2008년초 300~350만원에 비해 3배 가까이 올랐다. 상권의 가치를 말해주는 권리금도 4억~5억원 정도로 1억7000만~2억5000만원이었던 5년 전과 비교하면 2배 이상 뛰었다.

수억원대를 호가하는 권리금 때문에 유명 프랜차이즈 브랜드마저 비싼 월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리를 빼기도 했다. 가로수길 인근의 K공인 관계자는 “가로수길에 대기업 매장들이 서로 들어오겠다며 상가 주인에게 주변시세의 2배 가까운 보증금과 월세를 제시하는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며 “얼마 전엔 카페베네 같은 유명 브랜드 커피전문점도 더 비싼 월세를 제시한 곳에 밀려 재계약을 하지 못했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가로수길 끝자락에 입점한 미국계 SPA 브랜드 'FOREVER21'. 지상 5층 규모로 작년 6월에 가로수길에 입성했다.

소규모 점포들은 급등한 월세와 권리금에 엄두를 내지 못할 상황. 때문에 가로수길에서 오래전부터 장사하던 소규모 가게들은 이미 가로수길 옆 양 갈래 거리로 자리를 옮겼다. 이른바 ‘세로수길’로 이전한 것이다. 13평 규모의 패션잡화점을 운영하는 세로수길의 한 매니저는 “2년 새 세로수길 일대 상권 권리금도 2000만~3000만원씩은 올랐다”고 말했다.

가로수길에서 밀려난 점포들이 세로수길로 몰리면서 이 일대 상권도 최근 크게 달아오르고 있다. 인근 전용면적 66㎡ 기준 임대료가 1년 전 400~500만원에서 최근 600만원으로 올랐고, 권리금과 보증금도 1억2000만원 선에서 1억5000만원까지 올랐다고 주변 중개업계는 전했다.

3년 전부터 세로수길에서 10평 남짓한 소규모 레스토랑을 운영해온 김지현(가명) 사장은 “이곳 일대가 의류 특구로 지정되고 나서 부동산 컨설팅 업체들이 대기업 브랜드들과 손잡고 상가 권리금과 임대료를 높이기 시작하면서 세로수길 점포들까지 덩달아 오름세”라며 “옆 건물 의류매장도 2년 새 50%나 월 임대료가 올랐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 분당선 개통에도 꿈쩍 않는 압구정…권리금 없는 곳도 수두룩

2000년대 중반부터 영업해온 로데오거리의 한 주점. 한때 권리금이 1억3000만원까지 올라갔던 곳이지만 최근 매출이 급감하며 권리금 5000만원에 임대로 나왔다. 그나마 권리금이 남아 있는 자체만으로도 사정은 나은 편이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 메인도로에서 한 블록만 벗어나도 권리금 자체가 없는 곳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압구정 로데오거리 이면에 나 있는 한 레스토랑. 한창 영업중이어야 할 시간이지만 문을 닫은채 방치돼 있다

신사동 S공인 관계자는 “로데오거리 메인도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권리금이 없는 곳도 많다”며 “분당선 개통에 따른 호재가 있을 법도 하지만, 한번 맥이 빠진 상권이 되살아나는 데는 힘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리금을 포기하고 아예 폐업한 점포도 있다. 실제로 현장을 찾은 오후 1시쯤, 점심 식사로 한창 영업 중이어야 할 시간대지만, 도산공원 주변 식당 중에는 아예 문을 닫은 곳도 있었다. 한 층을 통째로 임대로 내놓는다는 현수막을 내건 건물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상가가 빠지고 내부정리가 되지 않아 실내가 먼지만 쌓인 채 방치된 곳도 있었다.

로데오 이면도로의 전용면적 30평 규모의 한 1층 식당은 최근 권리금 5000만원에 가게를 내놨다. 3~4년 전만 하더라도 1억원을 받던 곳이었는데 로데오의 불황에 인기가 반 토막 난 것이다. 분당선 개통 이후 4개월이 지났지만 한번 가라앉은 상가 분위기는 다시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인근 중개업계에 따르면 로데오지역 메인거리를 제외한 100㎡ 상가점포는 임대료 300만~500만원에, 권리금은 5000만~1억원 선이다. 일대 가장 큰 호재인 분당선 개통 전인 1년 전과 비교해도 제자리걸음을 하는 수준이다.

박대원 상가정보연구소장은 “분당선 개통이라는 호재가 있긴 하지만 교통 편의성이 상권의 결정적인 장점이라고 할 순 없다”며 “소비자들을 움직이는 건 결국 상권의 콘텐츠인데, 로데오 상권은 이미 가로수길이나 인근 청담 상권에 밀리면서 점차 위상도 잃어갔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