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이동통신사가 휴대폰 구입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듯 자동차 딜러(전문판매상)들이 소비자들에게 ‘인센티브’를 실어 준다. 소비자들은 정찰가에서 인센티브를 뺀만큼 돈을 지불하기 때문에 최종 자동차 가격은 결국 딜러가 인센티브를 얼마나 쳐주느냐에 달려 있다.

지난달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북미국제오토쇼'에서 도요타가 선보인 코롤라 모델 '퓨리아' 콘셉트카.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미국 내 딜러들은 작년 12월 자동차 한 대를 팔 때마다 평균 1756달러의 현금을 인센티브 명목으로 소비자에게 돌려줬다. 중형 세단 ‘캠리’ 2013년형 모델 가격이 트림(차량 등급)에 따라 2만2235달러~3만465달러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도요타는 차 값의 5.7~7.8%를 깎아준 셈이 된다.

도요타가 지급한 인센티브는 2012년 9월 평균 1649달러와 비교하면 3개월 만에 6.4% 늘어난 수치다. 최근 엔저 덕분에 일본에서 수입하는 자동차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딜러들 마진이 늘고, 더 많은 인센티브를 지급할 수 있다.

늘어난 인센티브는 판매량으로 직결됐다. 작년 12월 미국 시장에서 도요타의 판매량은 총 19만4413대로, 전년 동기 대비 9% 성장했다. 도요타를 맹추격 하고 있는 현대·기아차의 판매량이 같은 기간 5% 늘어나는데 그친 것과는 큰 격차다. 현대·기아차의 인센티브는 1대당 1573달러로 도요타와 비교하면 183달러, 우리돈 20만원 정도가 적다. 미국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인지도에 가격까지 열세라면 판매량 격차는 당연한 결과다.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엔저를 무기로 가격 공세에 나서고 있다. 사진은 일본 도요타 쓰쓰미 공장의 프리우스 차량 조립 라인.


◆ 일본 차, 엔저 등에 업고 파상공세

지난해 10월 시작된 엔저의 영향이 현대·기아차의 수출 전선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도요타·혼다 등 일본 브랜드들이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주요 시장인 미국·유럽 등에서 판매량을 늘리면서 현대·기아차의 성장세에 제동이 걸렸다.

엔저에 대한 공포가 과장됐다는 평가도 있었으나, 작년 연말 이후 국산차와 일본 브랜드들의 성적표는 크게 엇갈리고 있다. 지난해 12월에 이어 지난달에도 미국 시장에서 일본 도요타와 혼다의 자동차 판매량은 1년전 대비 각각 27%, 13%씩 늘면서 현대·기아차의 성장률(2%)을 크게 앞질렀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우려해왔던 ‘엔저의 습격’이 시작됐다고 분석한다.

엔저가 일본 자동차 업계의 무기가 되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일본에서 만든 자동차가 미국 등 글로벌 시장으로 팔릴 때 과거보다 싼 가격에 수출되는 경우다. 엔화 가치가 내려가면 미국 내 수입업자는 더 적은 달러를 주고 일본에서 차를 들여온다.

예컨대 대형 세단 렉서스 GS(소매가 4만7250~5만9450달러) 한 대를 수입하는데 지난해 9월 4만달러를 지출했다면 이제는 최저 3만3120달러만 쓰면 된다. 같은 기간 1달러 당 77엔에서 93엔으로 엔화 가치가 폭락했기 때문이다.

차를 더 싸게 수입해서 남는 돈은 과거보다 더 많은 인센티브로 소비자들에게 돌려줄 수 있다. 도요타가 최근 미국 시장에서 많은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도,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엔저와 무관치 않다. 지난 두 달간 도요타의 판매량 증가세가 이를 설명해준다.

여기에 미국 현지에서 생산되는 일본 자동차 역시 과거보다 가격이 낮아질 여지가 크다. 도요타·혼다·닛산 모두 미국에 현지 공장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출고되는 자동차의 부품 중 상당수는 일본에서 만들어져 미국으로 공급된다. 2만여개 부품이 조립돼 생산되는 자동차 특성상 부품 가격은 완성품 가격에 직결된다.

최근 원화 가격은 반대로 오르고 있다는 점에서 엔저를 무기로 한 일본 브랜드들의 공세는 더욱 가열차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는 ‘엔화약세와 자동차 산업영향’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원·엔 환율이 10% 하락(엔화 가치 하락)하면 우리나라의 자동차 수출이 12%쯤 감소할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한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일본에서 생산하든 미국 현지에서 생산하든 엔저는 일본 자동차 가격의 인하 효과를 불러온다”며 “엔저가 지속될수록 한국산 자동차의 가격 경쟁력이 뒤처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최근의 엔저 현상은 일본 업체들과 경쟁하고 있는 현대기아차에는 위기다. 사진은 광주광역시 서구 내방동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제2공장.


◆ 환율로 흥한 현대차, 환율 역습에 노출

현대·기아차를 비롯한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그동안 환율의 최대 수혜자였다는 점에서 엔저 현상은 전에 없던 '환율의 역습'으로 평가된다.

1997년 10월 900원대 초반이었던 원·달러 환율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와 미국 리먼브라더스 사태를 거치는 동안 꾸준히 상승했다. 2007년 일시적으로 1000원 안팎까지 내려가기는 했으나 이후 작년 하반기까지 1100~1200원을 맴돌았다. 여기에는 정부의 고환율 정책이 큰 역할을 했다.

이 같은 환율상승(원화가치 하락)과 정부의 고환율 정책은 현대·기아차의 수출에 더 없는 호재로 작용했다. 지금의 일본 자동차 업계와 마찬가지로 낮아진 원화 가치를 활용해 가격 경쟁력을 누릴 수 있었다. 내수 시장에 머물던 현대·기아차가 해외 판매량을 본격적으로 늘리기 시작한 것도 IMF 사태 이후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고환율 정책을 유지했던 현 정부 집권 기간에도 환율 효과를 톡톡히 봤다.

IMF 직후 현대차는 높아진 환율 덕에 수출이 급증했다. 1999년 인천항 4부두에서 수출용 차량 선적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

현대차는 2009년부터 2012년까지 4년간 매출·영업이익이 매년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현대차는 매출액 84조4697억원, 영업이익 8조4369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매출액은 8.6%, 영업이익은 5.1% 증가했다. 영업이익률은 2011년에 이어 2년 연속 두 자릿수인 10%를 기록했다. 특히 최근 6년 중 환율이 급등했던 2008~2009년 사이 현대·기아차의 세계 시장점유율이 가장 큰 폭(1.4%p)으로 증가했다.

기아차 역시 작년에 매출액 47조2429억원, 영업이익 3조5223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액은 전년 대비 9.4% 증가했으며 영업이익은 0.7% 늘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자동차를 팔고 달러로 받아 놓은 돈은 환율이 오르면서 고스란히 환차익으로 돌아왔다. 현대차는 2008년 한해에만 2437억원을 환차익으로 벌어 들였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벌어진 1997년과 1998년 현대차 환차익은 각각 2405억원·4637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지난해 4분기 원화 값이 오르고 엔저가 본격화되자 현대차의 영업이익률은 10% 이하로 떨어졌고, 기아차는 1년 전 대비 영업이익이 반토막 났다. 증권가에서는 원·달러 환율이 10원 내리면 현대차는 1200억원, 기아차는 800억원 가량 매출이 줄어든다고 추정한다. 그동안 현대·기아차가 쌓아온 실적의 상당 부분은 ‘환율 효과’였던 셈이다.

조철 산업연구원 주력산업팀장은 “원고-엔저 현상이 고착화되면 국내 완성차 업계에는 환율 이중고에 빠질 수 있다”며 “단기간에 해외 생산량을 늘릴 수 없다면 품질 등 근본적인 경쟁력을 제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